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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n 18. 2022

도둑맞은 가난 /독후감200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저 사람이 제 가난을 훔쳐 도망가요!!”

“뭐?? 지갑을 훔쳐가는 게 아니라 가난을 훔쳐간다고? 그냥 두는 게 맞지 않아?”




 내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가난을 부잣집 아들이 훔쳐갔다.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 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문틈은 꼭꼭 봉하고 나를 뺀 네 식구가 나란히 나에게 물려준 가난이다. 내가 공장에서 돌아왔을 때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죽어 있었다.


 부잣집 대학생 아들내미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너무 고생을 모르고 사나 싶어 돈 많은 아버지가 아들을 무일푼으로 쫓아내어 산동네에 사는 처녀의 가난을 훔쳐갔다.

 이제는 자신의 집에 들어와 심부름도 하고 야학도 배우라고 한다.


 나는 받은 돈을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치고 그를 내쫓았다.

목이 터지게 악다구니를 치고 갖은 욕설을 퍼부어 그가 혼비백산 도망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고단한 세월 속의 삶이다.

경험의 유무를 떠나 이런 삶을 안다.

국민학교 시절을 통해 이런 삶을 알 수 있는 지금의 나이다. 하지만, 부자들의 가난 장난이라?? 이를 통해 가난은 더욱더 섬세하게 피부로 와닿는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극심한 빈부의 차도 여전하고 가난도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같은 책에 있는 [나목]의 가난은 전쟁에서 만들어진 가난이고, 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가난이다. [도둑맞은 가난]의 가난은 전쟁과는 무관한 삶과 생활의 가난이다.

 [나목]의 가난은 연세가 일흔여든이신 분들이 겪었던 가난이고, [도둑맞은 가난]은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기에 이 삼십 대도 이해할 수 있을 가난이다. 가난이 전 세대를 꿰고 있어 씁쓸하다.


읽는 도중 박경리 선생님의 글이 문득 비쳐 떠오른다.

두 분이 다섯 살 차이로 동시대적 공감대로 글을 쓰셨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생활하는 장소가 그렇게나 중요하다. 박경리 선생님은 통영의 가난을 쓰셨고, 박완서 선생님은 서울의 가난을 쓰셨다. 나는 두 분의 친분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각자 글에서 서로를 교차하는 정서가 느껴진다.

왜 그렇게 가난에 대해 적으셨을까? 한국 근대소설은 왜 그렇게 가난을 적고 있을까?

그 시절에는 가난이 당연했고 가난이 전부였기 때문이었을까?




 단어만 바뀐 가난은 여전하다.

예전엔 새 고무신을 살 수 없었던 가난은 스마트폰을 살 수 없는 가난으로 단어만 변했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명제가 새삼스럽게 사실로 느껴진다.

그래도 글쓰기는 변함이 없어서 좋다.

예전 글을 읽어도 좋고 지금 글을 읽어도 좋다.

예전 글을 읽어도 구식이란 생각이 들지 않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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