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이다.
그녀는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선천적인 고도근시를 앓았다. 50대에 이르러 좋지 않은 눈 상태에 중심성망막염이 더해져 거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을 경험했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안경 없이도 또렷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행운도 맛본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에세이에는 그녀의 삶이 담겨 있구나! 각자의 에세이가 다 다른 이유이다.
30대 여자가 수영장 물속에서 자신만의 템포대로 걷고 있는 표지를 무심코 집어든 책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3번씩 그리고, 매번 2km의 수영이 낙樂 인 나로서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의외로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내 말로 부연하는 것보다 짧은 문장자체가 더욱 다가오기에 그대로 적어본다. 모조리!
좋아하는 일을 하든가,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든가.
일이란 내 힘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기쁨이 시작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원하는 모든 것이 내 손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요술봉을 대신할 수 있는 딱 하나는 바로 인내다.
‘남들만큼’ 이란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그저 ‘신의 도구’로서 살아가는 순간들에 만족하는 것이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실은 서로 고독하다. 왜냐하면 각자 나름대로 살아갈 것을 신에게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좌절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이 세상에 완전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떤 운명으로부터도 우리는 배운다.
즉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에 닥쳤을 때마다 하루나 이틀 밤을 푹 자고 이삼 일을 별일 없이 보내버린다.
사람은 오랜 세월 헤매야 하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눈이 안 보여도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위로해 주는 분들이 많았지만 소설은 수차례 반복해서 읽고 퇴고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반쯤 교활한 인간에겐 어김없이 그만큼의 교활하지 않은 인정이 남아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한계를 인정했을 때 오히려 마음이 안정된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넘겨짚지 말자고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타일러왔다.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형태는 서로 간에 뜻이 맞지 않고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칭찬 맞든 야단 맞든 본질은 그대로다.
믿음은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조작을 거쳐야 한다.
서로의 신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금물이다. 신상을 털어놓는 그 순간부터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착각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자녀는 타인 중에 특별히 친한 타인이다.
서툰 불평은 짜증이 나지만, 정리가 잘된 불평은 예술이 되기도 한다.
행복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힘은 각자에게 달리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등불이 될 수 있다.
염려와 공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생겨난다.
절망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나서서 나의 상황을 개선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과 성공 간의 관계는 불분명해서 세상 살아가는 것이 부드럽다.
감사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영혼의 고귀한 표현이다.
많은 에세이들이 간소한 삶을 언급한다.
그만큼 많은 작가들이 꿈꾸는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쉽지 않은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