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제목 정도는 알고 있으나 대개는 읽지 않는 위대한 한국문학 혹은 지금 현재 한국문학의 자양분이 되어온 위대한 한국문학에 딱 들어맞는 [무정] 그리고 작가 이광수. 급격하게 마흔 중반의 나이부터 친일행위로 기울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작품을 등한시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문학이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보고 배운 것이 전부였고 시험공부를 위해 외웠던 작가와 소설이름이 전부였다. 소설책을 읽겠다고 먼저 집어 들었던 책들은 외국문학 소설이 먼저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드디어 자발적으로 직접 읽게 된 위대한 한국문학 앞에서 나는 한국인임을 느낀다. 조선인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된다.
문학은 우리네 삶을 근간으로 적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이제껏 습득했던 한국 근대사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구절절 너무나 많은 동감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은 유명한 외국소설을 먼저 읽어보는 것보다 위대한 한국문학을 먼저 읽어 보기를 권한다.
글밥에 몰두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희열만큼 독서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다.
현대現代에 살면서 근대近代를 알게 되고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현대인과 근대인은 여전히 ‘변함없다’라는 동질감, ‘나와 똑같은 걱정을 하며 사는구나’ 하며 쓰~윽 입꼬리도 올라가고 흥~하고 콧바람도 불게 된다.
무엇에 그렇게 동질감을 느꼈을까?
결정 장애라는 단어가 있다. 행동이나 태도를 정해야 할 때에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일을 말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시절에도 이와 같은 단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결정 장애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설 마지막 페이지까지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내적갈등을 겪는다.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타인과 주변인을 저울질한다. 이전에 높게 평가했던 이도 또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면 멸시하고 업신여긴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얕보았던 이가 전인격적 진중함이 우러나게 되면 그런 마음을 갖았던 자신을 한없이 질타한다. 꼭 지금의 우리와 똑같지 않은가!!
한국이나 외국에 상관없이 문학사에 위대하게 남는 모든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으라 하면
탄탄한 스토리도 좋고 플롯도 중요하지만 ‘등장인물의 마음과 내적갈등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의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세밀하게 소소한 부분까지 외모도 아니고 사람의 감정을 그렇게 적을 수 있을까? 이렇게 한 번 놀라는 것이 아니라 기백 페이지 전개되는 소설 와중에 매번 놓치지 않고 매번 독자를 놀래 키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정말 글 쓰는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혹시 분량도 비교적 적고 유명한 외국 소설인 카프카의 [변신]은 읽은 적이 있고, 아직 위대한 한국 소설 이광수의 [무정]은 읽어보지 못한 상황이라면 카프카가 대단한 작가라고 느낄만하다. 하지만 이후 [무정]을 읽게 된다면 당연코 이광수도 카프카에 뒤지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소설 배경이 내 나라 조선이고 우리 선대에 살았던 내 조상이라 무엇 하나 이질감이 없다.
미국 유학을 앞둔 부잣집 딸 선형, 그녀의 개인교사 형식, 오래전에 형식과 정혼했던 평양 기생 영채. 이 세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갈등, 배신, 상생의 이야기를 기본 얼개로 한다. 통속적으로 보이는 남녀 관계의 이야기를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 전통과 계몽, 숙명론과 교육적 열정 같은 대립적 요소들이 소설에 녹아 있다.
동시에 근대화의 이행 과정에서 욕망과 혼돈으로 일그러진 당대 한국인들의 모습들이 소설을 더욱더 쫀득하게 만든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부자타령이 제격이다.
부가가 가난한 자를 압시하고 천대하여 가난한 자는 능히 자기네와 마주 서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고 길가에 굶어 떠는 거지들을 볼 때에 소위 제 것으로 사는 자들이 개나 도야지와 같이 천대하고 기롱하여 침을 뱉고 발길로 차는 것이라. 그러나 부자 조상 아니 둔 거지가 어디 있으며, 거지 조상 아니 둔 부자가 어디 있으리오. 저 부귀한 자를 보매 자기네는 천지개벽 이래로 부귀하여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귀할 듯하나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와 더불어 식은 밥을 다툰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될 날이 있을 것이라. 칠팔 년 전 박 진사를 보고야 뉘라서 그의 딸이 칠팔 년 후에 이러한 신세가 될 줄을 짐작하였으랴. 다 같은 사람으로 부하면 얼마나 더 부하며 귀하다면 얼마나 더 귀하랴. 조고마한 돌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놈들, 나는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로다’ 함과 같으니 제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또 지금 제가 올라선 돌은 어제 다른 사람이 올라섰던 돌이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 밥 한술을 줌은 후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 밥 한술을 줌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그렇게 하여달라는 뜻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지금 어떤 거지를 박대하고 기롱함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이렇게 하여달라 함이 아닐까. 모르괘라, 얼마 후에 영채가 어떻게 부귀한 몸이 되고, 선형이가 어떻게 빈천한 몸이 될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