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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May 02. 2019

전자오락실과 농구대잔치

40대 남자들의 자기소개서 I

대한민국의 40대 남자들은 골목길을 뛰놀며 자랐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골목마다 차가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는 2300만대가 넘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등록된 자동차의 수는 고작 100만대 정도였다. 그 시절에는 집밖에서 노는 것이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TV나 전자오락실 정도를 빼고는 아이들이 실내에서 즐길 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처럼 하루를 꼬박 채워 학원을 다니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 시간도 넉넉한 편이었다. 골목길이든, 공터든, 학교 운동장이든 공간이 있으면 놀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전 세대가 즐기던 전통적인 놀이인 구슬치기, 딱지치기는 기본이고 비석치기, 땅따먹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같은 놀이는 40대에게 익숙하다. 또, 1982년에 시작한 프로야구 열풍에 야구가 남자 아이들의 주종목이 되기도 했었다. 꼭 야구 장비가 없더라도 상관 없었다. 적당히 넓은 공터와 테니스 공 하나만 있으면 야구 흉내를 내기에는 충분했었다. 도심보다 더 한적한 시골에 살았던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뛰어놀았다.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까지도 농사를 업으로 삼던 이들이 많았고, 농촌이 고향인 베이버부머 세대들도 많았던 터라 '시골'은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그 시골에 살던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국민학교 시절에 시골에 내려가면 친척 형, 누나들과 어울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썰매와 비료포대 눈썰매를 타던 기억을 가진 40대는 제법 많다.


40대 남자들이 어렸던 시절, 가장 인기있었던 실내 놀이터는 전자오락실이었다. 전자오락실은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해 1980년대 들면서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한창 인기가 치솟던 1980년대 중반에는 거리에 오락실이 몇 개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갤러그, 너구리, 방구차 같은 게임들이 초창기에 유행했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100원짜리, 50원짜리 동전을 들고 오락실로 몰려들었다. 열광했던 아이들의 마음과는 달리 어른들은 오락실을 좋게만 보지는 않았다. 전자오락실들은 ‘두뇌계발’이라는 그럴듯한 마케팅 문구를 내걸었지만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이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 곳이었다. 많은 어른들이 전자오락실을 청소년의 탈선과 연관 짓기도 했다. 덕분에 방과 후에 학교 선생님들이 학교 주변 전자오락실을 검문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락실은 항상 만원이었다. 레버와 버튼으로 상상의 세계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재미는 골목길을 뛰어노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PC방이 스타크래프트(StarCraft)라는 게임의 열풍을 등에 업고 실내 놀이의 메카로 자리잡을 때까지 전자오락실은 최고의 실내 놀이터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중학교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40대들이 중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에는 남녀공학 학교가 드물었다. 남자는 남자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고 국민학교와는 달리 엄격한 선후배의 관계를 몸소 배우게 된다. 2차 성징이 올 무렵이 되면 반에서 몇몇은 담배나 술을 하기도 하고, 야한 소설이나 만화책, 잡지책 따위를 돌려보면서 키득거리는 일도 잦았다. 그때 생긴(각성한) '야함'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은 40대뿐만 아니라 남자의 인생을 통틀어 이어진다.


중학교에서 습득한 위계와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연장된다. 40대 남자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까지다. 고등학교 생활은 사회에 나가기 위한 능력과 사회 진출의 방향에 비중이 맞춰졌다. 일반적으로 대학 진학을 바란다면 인문계열 고등학교로, 취업을 원한다면 지금의 특성화 계열인 상업이나 공업 계열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몸은 커질대로 커졌지만 삶에 대한 결정권은 여전히 부모나 선생님에게 있었고, 그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20대를 살아갈 환경이 정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취업을 준비한다면 특정한 기술 분야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실습을 통해 일하는 능력을 키웠다. 대학 진학을 준비한다면 학교와 집을 오가며 책과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인문계열 학교를 다니는 경우라면 졸리는 눈으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해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학교로 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집을 나설 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지만 실상은 선생님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어울리는 생활이었다. 그 비극적인 전통은 학교 대신 학원으로 바뀌어 지금 중고등학생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물론 가만히 공부만 하지는 않았다. 에너지가 차고 넘칠 10대 후반의 나이에 학습에만 집중하는 일은 대부분의 남학생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업 후 쉬는 시간에는 교실이 요란스럽기 이를 데 없어지고, 체육 시간에 공이라도 하나 던져주면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지금 40대 중반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초에는 유난히 농구가 유행했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동네 농구 코트에는 학생들이 바글거렸다. 40대 초반이라면 만화 '슬램덩크'에 꽂힌 경우가 많았고, 40대 중후반들은 농구대잔치에 관심이 컸다. 당시 농구대잔치에서는 기아자동차의 허재와 강동희, 삼성전자의 김현준, 연세대학교의 문경은과 이상민, 고려대학교의 현주엽 등이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 NAB에서는 농구의 신이라는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가끔은 본능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수컷의 강함'을 겨루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멋지거나 파워풀 하진 않았다. 마주보고 욕설을 주고 받다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책상과 의자가 넘어간다. 서너번의 주먹질을 나누고 나서는 서로 부둥켜 안고 자빠져서 바둥거리다가 친구들이 뜯어 말리면 씩씩거리면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주의를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했지만 멋들어짐과는 거리가 먼 장면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신기하게도 남자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주먹을 나누는 일이 선생님께 적발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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