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 - 세상은 넓고 내가 할 일은 적다 III
특정한 노동활동을 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일반적인 근로자들은 고용불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고용 유지 여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든 남의 밑에서 일하든 처지는 비슷하다. 나의 고용 여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 혹은 시스템이나 환경의 몫이다. 예를 들어 장사나 사업이 잘 돼서 권리금 높게 받고 가게를 넘기거나, 높은 값에 주식을 팔아 사업체를 넘기고 그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장사나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접어야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기보다는 상황에 떠밀린 거라고 봐야 한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고용의 유지를 원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스스로 고용을 포기하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남는 건 고용 유지인데, 그 선택은 일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조직의 몫, 시스템의 몫, 조직과 시스템에 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몫이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절을 살고 있는 40대 남자의 경우에는 필사적으로 고용의 유지를 원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으로는 이 놈의 회사, 이놈의 장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겠지만,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활의 유지가 어렵다. 비록 다른 연령대나 성별에 비해 40대 남자의 소득이 가장 많다고는 한다. 하지만 버는 족족 쓰기 바쁘고, 그동안 모아둔 재산이 많다고 해도 나머지 삶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40대 남자 직장인의 경우라면 그나마 목돈인 퇴직금으로 얼마 동안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꽤나 높은 연봉을 받지 않은 이상 퇴직금을 털어먹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들지는 않는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가 되든, 월급 도둑이 되든 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계속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평범한 40대 남자들의 상황이다.
고용과 삶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현실에서 ‘고용의 해지’는 삶에 균열을 낼 수밖에 없다. 고용에 대해 불안한 감정을 갖는 것은 삶에 균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감정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40대 남자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다시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 40대 남자들은 관리자급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관리자급 일자리는 일반 실무자급에 비해 쉽게 나지 않는다. 실제로 2019년 4월을 기준으로 40대 고용률이 14개월 연속 떨어졌다는 정부의 통계 발표도 있다. 고용률은 취업자 수를 인구수로 나눈 비율이다. 만약 일을 그만둔 뒤에 빠른 시간 내에 재취업을 했다면 고용률 자체는 크게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40대의 고용률이 계속 하락한다는 것은 재취업을 하지 못한 40대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40대가 재취업이 힘든 이유는 그들이 다른 세대들에 비해 ‘무겁기’ 때문이다. 헤드헌터들이 40대를 가장 인기 없는 연령대라고 할 정도로 40대 경력직은 무겁기 그지없다. 40대만 되어도 직급이나 연봉이 높은 편에 속한다. 40대 남자들은 이직을 하더라도 기존에 받던 대우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돈이 들어갈 곳이 워낙 많은 현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0대 남자들은 일의 노하우도 제법 있고 경험도 많고, 아직까지는 한창 일할 체력과 두뇌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직 경력과 능력만을 염두해서 일할 사람을 뽑을 수는 없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40대, 50대 경력직을 뽑을 때 신경 쓰이는 부분으로 나이와 연봉, 위계질서를 든다. 중장년 경력자의 경우 나이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연봉이나 직급만이 아니라 관계에서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이로 인해 기존 위계질서가 흐트러질 수도 있고 새로운 질서는 조직 내부의 혼란과 불만을 낳을 수도 있다. 말로야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해도 40대 초반 차장이 들어오는 것을 반길 30대 후반의 부장은 흔치 않다. 중장년 경력직의 눈에는 선입견으로 보일 테지만 이런 선입견이 중장년 경력직을 기피하는 실질적인 이유다.
이런 상황이니 40대 남자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일이 좋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다. 세대나 연령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간혹 직업을 통한 성취 욕구의 달성과 자아실현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특히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은 대학생들을 위한 진로설계 과목들을 살펴보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커리큘럼을 통해 철학적이기 그지없는 직업의 본질을 미리 학습한 덕분인지 몰라도 실제로 신입사원의 48.5%가 직생생활의 목적을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고 답한 설문조사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아실현과 직업의 관계는 교과서가 정의하는 만큼 끈끈하지 않다. 당장 계좌에 돈 100억 원이 꽂혀도 직업을 고수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장 회사를 그만둘 것이고 장사를 집어치울 것이 뻔하다. 대기업에 입사를 하고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자아실현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차라리 아프신 할머니의 무릎을 고쳐주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은 어린아이의 꿈이 자아실현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은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40대 남자들 역시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 일이 좋아서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직업이고 ‘먹고살기 위해서’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다.
다만, 일하는 이유와는 별개로 일을 하도록 만드는 동력(동기)은 존재한다. 돈을 많이 번다거나, 인정을 받는다거나, 성취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각자의 욕망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동력이 된다. 이런 욕망들은 ‘고용된 상태’에서만 달성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욕망이 많이 달성될수록 ‘고용 상태를 유지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반면에 일자리를 잃으면 돈도,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도, 성취감도 일을 통해서 획득할 수가 없다. 이 구조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된다. 고용을 보장받아 욕망을 달성할 기회를 얻고, 욕망을 달성하여 고용을 보장받아 다시 욕망의 달성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욕망의 달성 여부에 따라 욕망을 달성할 기회를 부여받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구조다. 이렇다 보니 그 욕망들의 밑바닥에는 고용에 대한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불쾌한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없애거나 피하려고 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면 생길 수 있는 미래의 불쾌한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고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고용에 대한 확신을 위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실적을 내면 나의 가치는 올라가고 그만큼 생존 확률은 커지게 된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고용불안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방법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무턱대고 열심히만 하다 보면 간혹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일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생긴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일중독/워커홀릭(Workaholic)이다.
중독이란 어떤 행동이나 물질이 쾌감을 주면 그 행동이나 물질의 섭취를 반복하고 싶은 욕구가 강화되어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중독은 쾌감(즐거움)과 연결된 개념이다. ‘일중독’이라는 개념은 그런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쾌감을 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간혹 순수한 성취욕 때문에 일에 중독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즐거움, 쾌감을 얻지 못한다. 일을 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그 보상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요에 의해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즐겁지도 않은 ‘일하기’에 중독되는 것은 뇌의 보상회로와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강박 장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강박 장애는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불안증(불안장애)의 한 가지다. 세균에 오염될까 불안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을 씻고, 도둑이 들까 봐 불안해서 자기 전에 몇 번이나 문단속을 확인하는 것이 불안증이다. 고용불안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주 특별하거나 특출한, 유일무이한 능력과 기술을 지니지 않았다면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최선이 방법이 된다. 그 최선의 방법으로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일중독자, 워커홀릭이다.
산업노동연구원의 <일중독 측정과 실태>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7%가 일중독자라고 한다. 그중에서 40대의 일중독 비중이 8.6%으로 가장 높다. 남성과 여성의 일중독 비중이 각각 7.6%, 6.1%이니 남성의 일중독 비중이 평균보다 1.08배 높다. 이 값을 40대 평균에 대입하면 40대 남자의 일중독 비중은 9%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일중독은 고소득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 연구보고서는 일용직과 자영업처럼 고용의 불안정성이 높을수록 일중독 위험이 높다고 분석했다. 일용직이나 자영업자가 일중독자가 될 확률은 일반 상용직보다 4.1%가 높고, 일용직의 경우 일이 없을 때는 조바심이나 불안감을 가지는 금단증상까지 겪는다고 한다. 고용의 안정성과 일중독이 상관관계에 있고, 일을 하지 않을 경우 금단증상까지 일으키는 지경까지 이른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이 더 커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중독은 일의 완벽을 추구하고 성취를 위해 몰입하는 행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로부터 생기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일에 매달리는 행위에 더 가까운 것이다.
고용에 대한 불안을 없앨 수만 있다면 일중독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해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피고용 상태를 유지할 확률은 높아진다. 쉽게 말해서 일의 결과가 좋을수록 직장인은 회사에 오래 머무를 수 있고, 자신을 스스로 고용한 자영업자는 영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일중독은 이런 간단한 논리적 구조를 바탕에 두고 있다. 문제는 일에만 매달리고 몰두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과가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점이다. 며칠 밤을 새워 기획안을 작성해도 그 기획이 선택되지 못하면 그만이고 남들보다 오래 가게 문을 열어놓는다고 해도 손님이 더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명제가 뒤집힌 적은 거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일을 한다는 것이 성과를 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옛날에는 근면 성실한 태도를 말했고 지금은 창의적 발상과 상상력을 말하지만, 결국 일을 하면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직장인이 회사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자영업자가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일의 성과가 좌우한다. 일중독이 성과를 보장한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이 일중독은 직무성과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관련 연구들은 일중독은 비단 직무성과뿐만 아니라 생활의 균형, 건강, 사회적 관계, 직업만족도 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굳이 이런 연구 결과에 기대지 않더라도 일중독이 업무성과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중독은 불안감의 해소가 주된 목적이다. 좋은 성과를 내면 불안감도 더 많이 해소되겠지만 일을 하는 일차적 목적이 성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일에 전념하지 못한다. 일중독자에게는 오랜 시간 동안 일을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하는 시간만큼은 불안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시험을 목전에 두면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시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이상 시험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안이 커져서 아무것도 손에 잘 잡히지 않기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책에 집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책상에 앉아서 책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불안은 사라진다. 일중독도 이와 비슷하다. 일의 성과가 있든 없든 간에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일에 매달리는 시간을 늘리기만 하다 보니 생활의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다. 늦은 퇴근과 이른 출근만이 아니라 주말이나 휴일도 일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몸은 몸대로 힘들고 마음은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신체와 정신 건강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못하는 직업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일중독은 남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더 열심히 일을 하도록 만들지만 성과와는 거리가 있는 단기적 처방이기에 고용에 대한 불안을 없애기에는 역부족이다.
퇴직 후의 삶이 걱정되기 시작하는 40대 남자들의 고용불안은 20대, 30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데다가 한번 자리를 뜨면 원래 있던 수준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의 일자리는 더욱 절실하고 소중하다. 앞서 말했듯이 40대 남자들은 다른 연령대보다 고용불안을 더 많이 느낀다. 이 말은 곧 40대 남자들이 일중독자가 될 확률도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서글프지만 40대 남자들이 처해있는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40대 남자가 가진 일의 족쇄를 풀어낼 뾰족한 방법은 없다. 지금처럼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할 자유가 희박하고,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으며, 짊어진 책임이 어느 세대보다 무거운 40대 남자의 고용불안은 어쩌면 고용이 해지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