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분노, 갑질 II
인정 욕구를 만족하기 위한 갑질
40대~50대 중년 남자들의 폭력적인 갑질은 권위의식이나 권력이 주는 쾌감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권력 행사에서 쾌감을 느끼기 위해 갑질을 한다면 권력의 행사에 집중하는 게 맞다. 하지만 중년 남자들의 많은 갑질들은 절대적인 권력 우위 상태에 있다고 하기 어려운 일상에서도 발생한다. 게다가 중년 남성들의 갑질은 권력의 행사라고 하기에는 분노의 감정이 너무 많이 실려 있다. 중년 남성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갑질은 권력이 아닌 다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 남자들의 갑질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열등감과 인정 욕구다.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우월감은 자존감을 높여주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노력을 한다. 하지만 모든 순간마다 원하는 만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지는 않다.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하거나, 우월감을 획득하기에는 권위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거나, 우월감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 적절하지 않거나, 단순하게 운이 나쁘거나 해서 원하는 우월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원하는 우월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면 그 자리에 열등감이 자리 잡는다. 우리는 그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은 열등감 때문에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구체화하고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며,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변화시키려는 과정이 삶을 형성해 나가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는 과정과 방법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 중년 남성들의 폭력적인 갑질 같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햄버거 투척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주문한 제품이 나오지 않았던 것 자체는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오류다. 주문한 사람이 착각했을 수도 있고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 실수였을 수도 있다. 짜증이 나고 불쾌하긴 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약간의 인내와 타협을 통하면 어렵지 않게 오류를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노를 앞세우는 이유는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도가 없었다는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주문한 대로 햄버거가 나오지 않은 일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갑질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오류를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기껏해야 고객의 권리에 관한 일을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대사건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극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은 스스로 열등감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자신이 조장한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상대의 기를 죽이고 무릎을 꿇리는 싸움을 벌인다. 그 싸움에서 '소비자의 권리'로 포장한 분노가 무기로 쓰이는 것이다.
부하직원에 대한 상사의 폭력적인 갑질도 인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발버둥의 일종이다. 상사는 부하직원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특정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이 권력은 조직의 체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권력이다. 따라서 집단 안에서 합의하고 용인한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해도 상사로서의 인정 욕구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다. 그럼에도 체계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노를 앞세우는 것은 그러한 방식이 자신의 인정 욕구를 충족하는 데 있어서 효율성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상사는 자신이 지시한, 혹은 책임지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부하직원으로부터 원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을 때 상사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렇게 생긴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권력을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효율성에 있어서 성능이 탁월한 '분노를 앞세운 공격'의 유혹에 빠진다. “당신은 머리에 뭐가 들었어? 대학 나온 거 맞아?” 같은 경멸과 야유가 섞인 인신공격이나 “이걸 보고서라고 썼냐? 너나 실컷 봐!!”라며 보고서를 부하직원의 가슴팍을 향해 휙 던지는 폭력적인 행동이야말로 상대를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살리는 길인 것이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욕설부터 늘어놓는 중년 남성들의 목적도 다르지 않다. 항의할 것이 있다는 얘기는 부당하거나 부조리한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자신이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받는 사람으로서,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충족하지 못한 인정 욕구는 열등감을 자극하게 되고 그 뒤는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강력한 분노를 동반한 공격으로 상대를 때려눕힘으로써 인정 욕구를 채우고 우월감을 얻는 것이다.
중년 남자들의 인정투쟁
분노를 앞세운 중년 남성들의 갑질들은 결국 '인정투쟁'의 한 방편이다. 나를 '절대 갑'으로 인정하고 고개를 조아리라는 과격한 몸짓이다. 공격적인 갑질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을 한다. 그런 경우도 물론 있다. 을이 의무와 역할을 충분히 하지 않거나 갑을 갑으로 보지 않는 을에 대해서 분노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에게는 소비자가 갑이고, 국회의원에게는 유권자가 갑이다. 그런데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고 난 후, 투표가 끝난 후에는 그 관계가 유명무실해지거나 거꾸로 뒤집히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을'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그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굳이 분노를 앞세우지 않아도 갑의 권력은 유효하다. 그럼에도 분노를 앞세우는 갑질을 하는 것은 을 때문에 분노해서라기 보다는 을을 공격하기 위해 분노를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
원래 분노는 자신 혹은 자신의 요구가 부정당하거나 저지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따라서 을이 갑의 요구나 주장을 묵살하고 거부하면 갑도 얼마든지 분노할 수 있다. 다만, 그 분노에는 조건이 있다. 갑의 요구나 주장이 보편적이고 정당해야 한다. 그리고 갑의 정당한 주장과 요구를 을이 의도적으로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갑의 분노가 공감을 얻는다. 하지만 주문한 햄버거 세트가 단품으로 잘못 나오거나 상사가 원하는 수준의 업무 성과가 나오지 않은 것을 점원과 부하직원이 의도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일은 사회 통념상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의 갑질을 하는 중년 남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을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을이 자신을 절대 갑으로,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상황을 해석한다. 그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생긴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기 위한 가장 직관적인 방법인 분노를 무기로 선택한다. 이때의 분노는 저항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을 위한 무기가 된다.
중년 남자들의 갑질이 인정투쟁에 가깝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갑질의 가해자 중 가장 많은 27.1%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실업자나 일용직 종사자였다. 그렇다면 실업자나 일용직이 아닌 중년 남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역시 인정 욕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실업자나 일용직이 아닌 중년 남성들 역시 자신이 처한 삶을 기반으로 하는 인정 욕구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삶은 몇 개의 큼직한 범주로 이루어진다. 직업을 선택해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이성(또는 동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삶의 큰 범주다. 이 범주들의 조화와 균형에 따라 삶의 윤택과 풍성함이 완성된다. 이를 두고 작가 유시민은 일, 사랑, 놀이, 연대의 균형을 맞춰서 살아가야 한다고 얘기했고, 알프레드 아들러는 사랑, 직업, 사회적 관계를 삶의 중요한 세 가지 과제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있어 중년이라는 시기는 이런 삶의 범주들 안에서 힘을 잃기 시작하는 때다.
직업은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역할을 하지만 중년 남자들은 이제 그 자리에서 물러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설 기회와 능력을 가진 일부를 제외한, 평범한 중년 남자들이 직업인으로서의 인정을 계속해서 유지하기는 어렵다. 배우자와의 사랑도 더 이상 매혹적이지 않다. 배우자가 아닌 이성으로부터 사랑스러운 남자로 인정받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 남자들은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외도가 50%에 달한다는 설문 조사는 ‘남자’로 인정받고 싶은 중년 남성들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받는 일 역시 어려워진다. 가장 가깝다는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일하느라 바쁜 남편, 얼굴 보기 어려운 아빠 정도의 위치다. 사회적 관계도 명함을 매개로 한 표면적인 관계가 대부분이다. 지위와 권한이 중심이 되는 '비즈니스' 관계를 제외하면 웬만한 ‘인싸’가 아니고서는 중년 남자가 관계에서 인정 욕구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즐거움을 찾으면 부족한 인정 욕구를 상쇄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40대~50대 남자들의 삶에는 자신만의 즐거움이 드물다. 생각해보면 제대로 놀아본 적은 아주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놀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다. 큰 마음먹고 놀아보려 해도 몸을 쓰는 놀이는 몸이 따라가 주질 못하고, 최신 유행하는 놀이에는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어린 시절 즐겨했던 일을 다시 해보지만 그때만큼 감흥이 나질 않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보려 해도 돈과 시간이 든다. 결국 휴일의 늦잠이나 친구나 동료와의 술자리 같은 '소확행'에 만족하는 것이 중년 남자들의 처지다.
많은 중년 남자들이 처한 이런 상황에서 인정 욕구는 콩쥐팥쥐에 나오는 바닥이 깨진 항아리처럼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깨진 바닥을 메워주는 두꺼비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채워지지 않은 인정에 대한 갈망은 열등감을 부채질하고, 그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분노를 동반한 갑질'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용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한국 중년 남성들은) 힘이 약해졌다고 느낄 때 다른 성별과 연령대보다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도 이와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그는 안정을 도모하고 권력을 성취하려는 욕구가 극대화되면 용기가 무례함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중년 남자들이 벌이는 못된 갑질은 열등감에 무너지지 않기 위한 인정투쟁인 것이다.
좋은 우월감과 나쁜 우월감
열등감을 해소하고 우월감을 성취하려는 의지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다만, 우월감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한다. 우월감에도 수준과 질(quality)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쾌함을 담보로 얻은 우월감은 수준과 질이 떨어짐은 말할 것도 없다. 형사소송의 법칙 중에 독수독과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에서 도출한 증거는 증거로서 능력이 없다는 원칙이다. 독수독과(毒樹毒果)는 ‘독이 있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는 독이 있는 열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비록 형법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지만 어떤 일의 결과가 그 원인이나 동기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 순리를 잘 설명한다. 독수독과의 비유를 빌어서 말하자면 나쁜 방법으로 얻은 우월감은 나쁜 우월감일 수밖에 없다.
나쁜 우월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얻는 우월감이다. 사이코패스이거나 지독한 자기애적 인격장애(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은 이상, 인간은 다른 이의 고통과 불쾌감에 무감할 수 없다. 그러한 고통과 불쾌감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행동했다면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는 비난이나 손가락질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보편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폭력적인 갑질을 하게 되면 권력의 행사로 얻은 우월감 보다 사회적 비난과 죄책감으로 인해 불쾌감이 더 커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 모두가 얕은 권력관계에서 억지로 우월감을 쥐어짜 낸 결과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자신에 힘에 만족하는 사람은 일탈적인 행동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갑질을 하지 않아도 자존감을 갖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갖게 되는 우월감이 좋은 우월감이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지만 그 욕구를 외부에서만 채우려고 하면 별 것 아닌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일이 생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으면 굳이 외부의 인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적을수록 열등감 때문에 노심초사할 일도 적어진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권력의 위계 안에서도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하다. 자존감이 넉넉한 사람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쥐방울만 한 우월감을 잃을까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얕은 권력관계에서 얻는 그런 우월감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일종의 에너지다. 열등감이 긍정적으로 쓰이면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열등감을 부정적으로 쓰면 인정과 우월감을 획득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어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갑질이다. 직장에서, 음식점에서, 백화점에서, 욕을 하고 고함을 질러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일이 가슴 뿌듯한가? 그렇다면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년 남자들은 갑질을 하기에 특히나 좋은 위치에 있다. 적당한 나이, 적당한 지위, 적당한 자존심은 갑질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에 더없이 좋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프로갑질러’가 되어버리기 전에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내적 풍요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이 마흔쯤 되면 공감, 관용, 배려도 인정 욕구를 채우는 데는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