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든 40대 남자들 I
2016년 10월 29일. 서울 광화문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민간인 최순실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비선 실세로서 국정을 농단한, 일명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날 이후로 매주 토요일이면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대통령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해를 넘긴 2017년 3월 10일, 스무 번째 집회를 앞두고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는 6개월 동안 스물 세 차례 열렸고 누적 참여 인원은 1600만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역사상 하나의 사안을 두고 이렇게 크고 긴 집회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인 의지로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일도 처음이었다. 공권력과의 충돌은 없었으며 누구 하나 다치거나 붙잡혀 가는 일도 없었다. 국민들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와 헌법의 틀 안에서 행동했다. 그 결과 헌법 수호 의지가 없는 권력자를 몰아내어 스스로 헌법을 수호한 것이다.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서도 40대의 참여율이 매우 높았다. 조사에 따르면 20대가 30% 정도로 참여 비율이 가장 높았지만 30대, 40대도 20대와 거의 차이 없는 비율을 보였다. 집회에 따라서는 40대의 참여율이 25%로 20대와 30대의 23% 보다 높게 나온 조사도 있다. 특히 100만 명이 참여했던 2016년 11월 12일 집회의 경우 40대 참여율이 42%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된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금언이다. 그리고 40대는 보수화가 시작되는 연령대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40대는 다르다. 아직은 꼰대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으며 삶의 진보를 여전히 꿈꾸고 있음을 실천과 참여로 보여주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지 않는 40대 남자들을 광장으로 나서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나 생각의 결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로 가도록, 단일한 메시지에 생각을 담도록, 촛불을 들어 원하는 것을 외치도록 하는 동기는 모두 같을 수 없다. 쉽게 말해 '박근혜가 잘못했다'라는 상황 인식은 같더라도 집회에 참여한 동기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일반인에게 넘기고, 그 일반인이 대통령의 권한을 자신의 것인 양 휘둘러 사리사욕을 채웠다. 정보를 통해 그것을 사실이라고 확인한 사람들은 부조리와 불공정, 정의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의 영역이다. 이성의 작동으로 도출한 상황 판단과 해석은 감정을 일으킨다. 그 상황이 본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거나 상황 자체의 심각성이 클수록 마음의 반응인 감정도 따라 커진다.
촛불을 든 이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보여준 거대한 부조리와 불공정, 정의롭지 못함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감정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에서 촛불로 탄핵을 외치게 한 동기가 된다. 시사주간지인 시사IN이 탄핵 촛불집회 당시 참여자들의 ‘촛불을 든 이유’를 취재해서 지면에 실은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답들 중에서도 아이들이나 미래 세대, 혹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는 말이 유독 많이 보였다. 여기에서 부끄러움 단지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부끄러움에도 갈래가 있으며 그 부끄러움 안에 다른 감정들도 녹아 있다.
아이들이나 미래 세대에 대한 부끄러움에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다. 아이들은 아직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이 적고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을 결정할 권한도 거의 없다. 그래서 원하지 않더라도 어른들이 만든 사회에 살아야 한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들지도 않은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사회를 거부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나마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면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에게 다행이다. 하지만 사회가 부조리하고 불공정하다면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책임이 있는 어른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특히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 중에 자신들의 아이도 속해 있기 때문에 그 미안함이 절절할 수밖에 없다.
이런 미안함과 더불어 불안의 감정도 생긴다. 사회는 부조리를 법과 규범으로 제재하고 잘못을 바로 잡도록 설계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모든 부조리가 바로잡히거나 단죄받는다고 장담은 할 수 없다. 하루에도 몇 건씩 뉴스로 나오는 재판 결과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이 일상이다. 그래도 정황이 명백하고 규모가 큰 부조리는 잡아내기가 쉽지 않겠냐는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조리의 규모가 클수록 바로잡기가 더 어렵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처럼 정치, 사회의 다양한 권력과 천문학적 규모의 이권이 개입된 거대한 부조리는 쓰레기 무단 투기에 범칙금 부과하듯 간단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큰 부조리일수록 부조리임을 입증하려는 쪽과 그것을 반박하는 측의 싸움이 길고 격렬하기 마련이다. 정황상 부조리임을 확신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조리임을 완전하게 입증하지 못할 경우에는 단지 추문에 그칠 수도 있다. 심하게는 일반 대중들의 정서에 반하는 법리적 해석으로 죄를 벗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어떤 거대한 부조리가 발견되면 이번에도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생긴다. 일종의 '학습된 불안'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와 고위 정치인들이 개입된 거대한 부조리를 법과 규범의 기계적인 적용만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부조리가 부조리에 의해 덮어지고 면죄받는 일을 숱하게 경험했으니 '역대급' 부조리 앞에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명백한 부조리조차 걷어내지 못한 사회를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불안들이 아이들과 미래 세대에 대한 부끄러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흔히 말하는 ‘자괴감’이다. 이 감정은 보통 남에게 비난받을 행동을 했거나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때 생긴다. 탄핵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비난받을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탄핵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끄러움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자괴감이다. ‘양심(良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도덕의식을 말한다. ‘가책(呵責)’은 스님들이 규칙을 어겼을 때 벌을 받는 것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말은 자신이 한 행동이 옳지 않거나 선하지 않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자신을 책망한다는 뜻이다. 탄핵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조리에 대한 항의이고 저항이다. 불의한 상황에 대해 항의하지 못하는(않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양심의 판단이 들면 부끄러움이 생기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탄핵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겁하다는 양심의 판단 때문에 자괴감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이렇듯 개인마다 처한 상황과 판단에 따라서 부끄러움의 결은 다르다. 그 부끄러움 안에는 후배 세대에 대한 미안함, 부조리가 바로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양심의 가책에 따른 자괴감 같은 감정들이 숨어있다. 그런데 과연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 부끄러움 속에 들어 있는 미안함과 불안, 자괴감만으로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들었을까? 그렇게만은 보기 어렵다. 각자의 감정이 다르다면 그 감정에 대응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다른 약속도 없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감정이 그들을 움직였다면 무언가 공통적인 감정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같은 행동을 했다고 봐야 한다. 수백만 명이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아주 크고 강력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인원 1600만 명, 그들을 움직인 동력
나의 잘못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그 원인이 나에게 있음이 명백하다면 좋지 않은 기분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나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거나 불안해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사과를 통해 상대의 감정을 위로해야 한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나쁜 감정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민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민은 합법적으로 권력을 양도했다. 그 권력을 양도받은 대통령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하게 권력을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법적으로 권력을 양도한 국민이 기만을 당하는 피해자의 처지가 된 것이다. 내 손으로 선출한 국가 지도자에게 기만과 속임을 당했으니 수치심과 모욕감이 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미래에 대한 불안, 자괴감 같은 불쾌한 감정까지 느껴야 했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런 나쁜 감정들을 무더기로 안겨준 대상에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갖을까?
돌이켜 보면, 진실한 사과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정도면 원만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위 초기에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들은 퇴진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3차 대국민담화에서는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국회에서 결정해 달라며 불명예 퇴진을 피하기 위한 노골적인 시간 벌기에 나서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잘못을 저지른 인간의 태도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3차 대국민담화가 있고 나서 나흘 후에 열렸던 여섯 번째 집회에는 230만 명이 참여했다. 이 날 참여자 수는 스물세 번의 집회 중에 가장 많은 수로 기록되었다. 여섯 번째 집회에서 사람들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 또는 탄핵을 요구했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정농단 세력을 구속하라는 구호도 늘어났다. 분노한 민심을 확인한 국회는 결국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했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탄핵 소추안 인용 여부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집회를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대통령이 파면된 후에도 네 번의 집회가 더 열릴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얼마나 들끓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풀고 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이성이 합리적인 해결책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성은 상황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주로 할 뿐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이성의 힘을 빌어 판단할 수 있지만 행동방식이나 태도를 정하는 것은 오히려 감정인 경우가 많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사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상황에 대한 판단이었다. 뉴스를 통해 정보를 얻고 나름대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 작업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역할이다. 이성에 의한 상황 판단이 끝나면 정신의 반응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기만당했다고 상황을 인식하였으며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고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여러 감정이 있었을 테지만, 그 많은 감정들 중에서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을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사건을 접하고 맨 처음 가졌던 감정인 분노였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 분노가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은 학계의 연구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현우 교수는 탄핵 집회 참여 요인으로 분노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현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과거의 집회들이 이념의 표출 공간이었던데 반해 2016~2017년 탄핵 집회는 시민들의 분노가 집합적으로 표출된 공간이었다. 영남대학교 통일문제연구소의 연구원인 도묘연 박사도 분노가 탄핵 집회의 참여에 큰 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도묘연 박사는 『2016년–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참여의 결정요인』라는 연구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가 탄핵집회 참여를 추동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조직에 소속되거나 동원되지 않은 시민들의 항의집회에서 분노는 필수적인 요인이라는 서구의 연구경향과도 일치한다고 한다. 불의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는 국적을 가릴 것 없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얘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