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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Jul 30. 2019

40대 남자들, 광장에 서다

촛불을 든 40대 남자들 II

40대 남자들이 촛불을 든 이유

40대 남자들의 마음도 광장을 채웠던 수많은 촛불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부끄러움과 미안함과 분노가 뒤 덤벅인 채로 광장을 지켰다. 감정의 크기로 따지면 그들의 분노는 그 어느 세대 보다도 크고 뜨거웠다. 40대 남자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연령별 참여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16년 11월 한 달 동안 광화문에서 열린 네 번의 집회(2, 3, 4, 5차 집회)를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40대의 참여율은 28%에 달한다. 또, 2016년 11월 12일에 있었던 3차 집회 참여자 경우 40대가 42%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조사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체 탄핵 집회의 참여율을 보아도 20대~50대 중 40대의 참여율이 다른 연령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게 나온다. 남녀 비율에서는 20대의 경우 여성의 참여 비율이 높았지만 30대부터는 남성 참여자의 비율이 6대 4 정도로 높게 나온다. 다시 말해 대통령 탄핵 집회는 이 전에 있었던 광우병 촛불집회나 세월호 집회와는 달리 '40대 아빠'를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의 참가 경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탄핵 집회에 40대 남자들의 참여율이 높았다는 얘기는 그들의 분노가 가장 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왜 40대 남자들의 분노가 가장 컸을까? 그것은 20대-30대와 50대-60대가 각각 느끼는 분노를 40대는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030 세대는 이제 막 사회에 진출했거나 한창 사회를 경험해가고 있는 세대다. 지금 살고 있는, 앞으로 자신들이 몸 담고 살아가야 할 사회가 거대한 부조리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국가 체제가 부조리하다면 한낱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그 결과가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손실이 눈 앞에 보인다면 그 손실을 일으킨 당사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5060 세대는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후배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중심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한걸음 물러서는 중이다. '본전 생각'을 한다면 그들이 겪었던 부조리를 젊은 세대들도 한번 겪어봐야 한다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탄핵 집회에는 그런 '꼰대'들이 아니라 젊은 세대를 걱정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바라는 '어른들'이 모였다. 그들은 공동체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후배 세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회에 공정한 시스템이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젊은 세대들의 희망을 꺾는 자들은 분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40대는 2030 세대와 5060 세대의 정확히 중간에 있다. 덕분에 그들은 2030 세대와 5060 세대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을 모두 느낀다. 40대 남자들은 아무리 짧아도 10년 이상 사회에 몸을 담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이 사회를 살아갈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이 마주한 거대한 부조리는 자신의 삶과 아이들의 삶 모두에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결국 40대 남자들이 유독 많이 분노한 이유는 부조리를 조장한 세력들이 40대 남자들의 현재와 미래 모두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40대 남자들의 삶의 이력도 그들이 가진 분노의 에너지를 키운 측면이 있다. 탄핵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분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촉발한 것이 맞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직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분노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탄핵 집회 현장에서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대통령의 퇴진 이외에도 많았다. 비리 관련자 수사와 엄벌, 특정 정당의 해체,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 친일파 청산, 특정 언론사에 대한 야유들이 즐비했다. 집회의 그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가 바로 ‘이게 나라냐’였다. 다시 말해 2016~2017 대통령 탄핵 집회는 지금까지 쌓여왔던 정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던 것이다.


그 분노의 중심에 40대 남자가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그만큼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50대 이상의 세대는 과거에 분노를 표출해본 경험이 있다. 그들이 젊었을 시절에는 학생운동도 활발했고 민주화 운동의 열기도 높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지금의 50대와 60대는 20대, 30대였다. 그들은 군부독재 정권에 분노해 거리로 뛰어나가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그 점에서 지금 20대, 30대와 50대 이상의 세대들은 비슷한 '젊은 시절'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0대는 그런 경험이 적다. 1987년 6.29 선언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1992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군부독재가 종식되자 학생운동은 시들해졌다. 세상이 완전히 정의롭게 탈바꿈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십 년에 걸친 싸움 끝에 얻어낸 민주화의 바람은 사람들의 분노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1997년 IMF 사태, 흔히 말하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회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경제 위기 앞에서 국가 시스템이 무력해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각자도생’을 삶의 근본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 바야흐로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아닌,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의 40대 중후반은 외환위기를 전후로 해서 사회에 진출했다. 불황과 경제난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던 지금의 40대 초반 세대 역시 외환위기의 여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삼촌이 명예퇴직당하고, 가정만 돌보던 어머니가 일터로 나가고, 형이 대학을 휴학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런 모습들은 당시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삶의 진로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 지속되던 경제 발전에 힘입은 낙관론은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젊은 사람들은 꿈을 좇기보다 공무원, 교사 같은 안정된 직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안정된 삶에 대한 욕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삶에 대한 근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IMF 사태는 무능한 정부와 안일하고 부도덕한 기업들이 만든 인재(人災)다. 지금 같으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에게 분노로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변화의 파도 앞에서는 누구를 심판하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살아남는 것이 삶의 큰 흐름이 되면서 그 이외의 것들은 무시되었다. 그런 와중에 사회에 진출한 지금의 40대는 먹고사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삼아 세상살이를 시작했다. 삶은 관성이 있어서 한번 속도를 내면 쉽게 멈추질 못한다. 이미 속도가 붙어버린 세상살이의 모양새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먹고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에서 사회의 부조리나 불공정은 술안주 거리밖에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정치적,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은 여전히 많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투표 같은 제도 안에서 매우 한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형식을 벗어나 분노를 표시하는 일은 광우병 촛불 집회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는 동안 40대 남자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여갔다. 결국 2014년에 있었던 세월호 사고가 그들이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분노의 양을 끝까지 채워버렸다.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 250명을 포함한 304명이 숨진 이 비극 앞에서 40대 남자들의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40대 남자들 대부분은 당시에 이미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들이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느끼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감정은 절망과 슬픔만이 아니었다.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지켜주지 못한 데서 오는 미안함, 국가 권력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지금까지 제대로 드러내 보지 못하고 쌓기만 했던 40대 남자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그 분노들을 한 번에 터뜨린 계기가 되었다.


40대 남자들의 분노는 가치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분노는 폭력성과 공격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감정으로 정의된다. 스피노자는 분노를 일컬어 '증오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라고 했고 세네카는 '분노보다 더 빠르게 광기에 이르는 길을 없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숱한 감정과 함께 해온 인간의 역사지만 분노만큼은 환영받지 못하는 감정이다.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분노의 결과는 항상 비극적이라는 관념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사람의 모든 행동과 감정에는 목적이 있다고 본 알프레드 아들러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노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아들러의 해석처럼 감정에 목적이 있다면, 그 감정은 목적 달성을 위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에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분노로 인해 생기는 일반적인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분노는 꺼려해야 할 나쁜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분노의 에너지가 좋은 방향으로 쓰인 예외적인 상황도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와 2016~2017 탄핵 집회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두 집회 모두 분노가 에너지 역할을 했다. 다만 광우병 촛불 집회 때는 경찰과의 대치와 충돌이 빈번했던 것에 반해 탄핵 촛불 집회에서는 폭력적인 양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또, 2019년 7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도 분노의 에너지가 좋은 방향으로 쓰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촉발한 것은 일본의 경제 보복이었다. (사실 '보복'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보복'이란 남에게 받은 해를 되갚는 행위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해도 가한 일이 없으니 '보복'이라는 개념은 성립이 안된다.) 그런데 일본이 이런 행태는 경제적 타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신념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분노의 감정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라는 행위의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서 과격한 선동이나 일본을 향한 폭력적인 행위는 거의 없다. 상대적인 면을 고려해야겠지만, 분노의 에너지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쓸 수 있음은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40대 남자들의 분노는 계속 지녀야 할 가치가 있는 에너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긍정적인 분노를 계속 품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한겨레 신문이 탄핵 촛불 집회 1주년을 맞아 탄핵 촛불 집회 이후 이념 성향의 변화를 묻는 여론 조사를 했다. 탄핵 촛불 집회 이후 더 진보적으로 되었다는 응답이 29.2%였는데, 연령대 별로 보았을 때 40대가 36%로 가장 높았다. 비록 세상살이에 매몰되어서 분노를 쉽사리 표출하지 못한 못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정의의 편에서 분노했고, 그 분노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사기에 이른 것이다.


386 세대의 보수화는 이미 충분히 진행되었고 세상살이가 팍팍해서인지 2030 세대도 급격히 보수화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40대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물론 세상은 나이 마흔을 넘어선 중년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저무는 해다. 그들도 언젠가는 보수화가 될 것이다. 40대 남자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꼰대, 개저씨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필요하면 얼마든지 분노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 세대들처럼 특정 이념에 쏠리지도 않았고, 엘리트 의식에 젖지도 않았다. 단지 상식적으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시민의 마음, 그런 올바른 세상에 자신들의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분노할 뿐이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40대 남자들의 분노는 충분히 쓸만한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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