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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을 전복하는 감정
사랑

40대 남자의 감정 Chapter 3 사랑

by 김성열

사랑은 아름다워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꼽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사랑'을 선택하리라 싶다. 사랑을 해본 적이 있고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동의할 확률이 매우 높다. 언젠가 영국문화협회에서 세계 102개 비영어권 국가의 국민 4만 명을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결과는 1위가 '어머니', 2위가 '열정', 3위가 '미소', 4위가 '사랑', 5위가 '영원'이었다. 사랑이 1위를 하진 못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1위, 2위, 3위, 5위 모두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머니는 조건 없는 사랑의 대명사다. 열정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정신의 고양 상태다. 미소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사랑을 받을 때 느끼는 행복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의 흔적이다. 영원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다. 모두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자 또 다른 모습이다.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감정으로 불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정기의 운동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정서 중 하나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대상과 자진하여 결합되게 하는 정서'라고 사랑을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사랑하는 대상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견고하게 밀착하고자 하는 감정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랑이다. 데카르트의 이런 정의는 '두 몸에 거주하는 하나의 영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의미가 닿는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사랑을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는 대상을 현실에서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라고 덧붙였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부작용(?)도 함께 얘기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현상은 17세기 사람과 21세기 사람이 전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사랑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이론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코넬 대학 교수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J. Sternberg)는 1986년에 <사랑의 이중 이론 : 사랑의 삼각형 이론과 서사로서의 사랑 이론>을 내놓았다. 스턴버그 교수는 사랑이 친밀감, 열정, 결심/헌신의 세 가지 구성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랑은 이 세 가지 요소들의 조합에 따라 여덟 개의 형태로 구분된다. 예를 들면 친밀감, 열정, 결심/헌신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갖춰졌을 경우 완전한 사랑이다. 친밀감만 있을 경우에는 단지 좋아함이며, 결심/헌신의 빠진 사랑은 낭만적 사랑, 열정만 있는 경우는 광적인 사랑이다. 물론 사랑을 기하학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턴버그 교수도 삼각형이라는 기하학 요소를 가져온 것은 단지 은유일 뿐이라고 논문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다만, 이러한 접근법이 존재하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호기심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전복의 감정, 사랑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처럼 사랑을 건조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스턴버그처럼 기하학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감정은 예찬의 대상이었고 기쁨의 원천일 뿐이다.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언제부터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부터 사랑은 그런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항상 좋은 감정만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사랑의 감정 자체는 좋은 감정들을 동반하지만 사랑이 나쁜 감정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 식었을 때, 사랑을 외면당했을 때, 원하는 정도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을 때, 사랑하는 대상을 뺏겼을 때는 나쁜 감정들이 생긴다. 식어버린 사랑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외면당한 사랑의 슬픔과 절망, 못다 한 사랑의 괴로움, 빼앗긴 사랑에 대한 질투와 치욕감 따위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불러온 결과다.


다시 말해, 사랑은 기쁨의 찬가를 부르게 할 수도, 슬픔의 눈물을 불러올 수도 있는 극과 극의 감정이다. 또,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큰 쾌감을 부르는 감정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끊지 못한다.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이 사랑을 거듭한다. 사랑에 실패해 괴로움과 고통을 겪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사랑을 한다. 급기야 사랑의 아픔은 또 다른 사랑으로 달래야 한다는 민간요법이 진리처럼 먹히는 정도다. 감정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정신이 반응이니 그 반응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사랑을 멀리하려는 이성의 노력마저 사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순간 무력해질 정도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기에 인류가 존재해왔을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보나 이성적으로 보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본다. 자신을 보존하려는 충동은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으면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헌신을 한다. 자식을 위해, 연인을 위해, 나라를 위해, 민중을 위해, 예술을 위해 자신의 보존을 잊게 하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이를 두고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이성을 거두게 하고 본성을 뒤집는 강력한 감정이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 본성의 전복을 노리며 삶의 내내 곁을 맴돈다. 50대, 60대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40대 남자의 입장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것이 친밀감이든, 열정이든, 헌신이든 간에 사랑의 대상은 삶의 모퉁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익숙한 모퉁이로만 왕래하는 40대 남자들은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다고 점잔을 빼는 뒤에는 열정에 중독되고픈 욕망이 꿈틀거리지 않을까? 그들에게 사랑은 어땠으며, 어떠하며, 어떠할까? 40대 남자들의 사랑을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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