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도 언어다
직장에서 상사 역할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맞닥뜨리는 상황 중에 '부하직원들의 침묵'이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위계의 관계를 떠나서, 한 말에 대해 대꾸를 얻지 못하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다. 다행히 상사들은 그런 무안한 상황을 정리하는 법을 알고 있다. 동의를 구했을 때 대답이 없으면 동의한 것으로 정리하면 된다.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구했을 때 부하직원들이 묵묵부답이면 생각이 없다고 면박을 주면 그만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는 논의나 대화가 완전하게 정리되었다고 할 수 없다. 부하직원들의 침묵에 대한 상사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상사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침묵은 동의가 될 수도, 생각 없음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침묵을 같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말이 없음'은 해석의 가능성이 여러 갈래로 존재하는 '언어 행위'다. 동의 여부만을 놓고 침묵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실제로 동의를 했기 때문에 대답을 거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동의 여부를 결정하지 못해서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전적으로 동의 하지만 말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침묵을 선택할 수도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에 대한 침묵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의견이(상사 입장에서는 '생각이') 없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의견이 있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입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의견이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느냐고 힐난하겠지만 직장생활하면서 생각이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나의 의견이 남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겁이 나서,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서 말을 아끼는 경험은 누구나 겪는다.
이러한 상황 고려 없이 부하직원들의 침묵을 동의로, 생각 없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상사의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만약 부하직원들의 침묵에 반대의 의미, 의견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대화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질문에 대꾸가 없는 무안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상사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상사 혼자 마음 편하려고 부하직원들의 머릿속을 제멋대로 정리해버리면 대화와 논의의 여지는 사라진, '답정너' 상황이 되고 만다.
상사도 사람인지라 말을 걸었는데 답이 없으면 불쾌하기 마련이다. 그런 불쾌함은 작은 분노를 만들고, 작은 분노는 얕은 공격성을 낳는다. 그 결과 "다들 동의하죠?...... 대답 없으면 동의한 걸로 합니다", "의견 없어?...... 다들 아무 생각 없는 거야?" 같은 '갑분싸'한 광경이 만들어진다. 이제 살짝 열 받은 상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동의한 사람이 되어버린, 확고한 증거도 없이 생각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부하직원들의 속도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침묵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침묵의 사정
어느 누구의 잘못인가를 콕 집어 얘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상황을 풀어갈 책임과 의무를 상사들이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면, 상사들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필요하다. 동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답이 없거나 적은 것은 완전한 반대는 아닐지라도 반대의 여지,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거꾸로 부하직원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자. 충분히 동의하는(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대답 못할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다. 말로 못하는 사정이 있다면 고개라도 끄덕이게 된다. 오히려 확정적인 대답이 적다면 논의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의견을 묻는데 아무 말이 없는 상황도 그만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의견이 있지만 아직 생각이 덜 정리되었을 수도 있고, 안건에 대해 생각을 많이 못했을 수도 있다. 거꾸로 부하직원들이 생각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정보를 충분히 주었는지 상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것도 없이 의견과 아이디어를 내라고 독촉하는 것은 상사의 갑질이다. 물론 생각할만한 충분한 시간과 정보를 주었다면 부하직원 개개인의 성실함이나 역량에 대해서 지적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하직원들을 도매금으로 '생각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짓이다.
침묵이 길어지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한 박자 쉬어가는 것이 상사와 부하직원 서로에게 좋다. 생각이나 아이디어라는 것들은 앉은자리에서 다그친다고 해서 마구 생겨나지 않는다. 당장 조직이 무너지는 급박한 처지가 아니라면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을 더 갖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좀 더 생각을 다듬어서 다시 대화를 시작한다면 부하직원들은 침묵으로 감쌌던 생각들을 말로 정리해내기 편해진다. 그리고 상사는 부하직원들의 생각과 태도를 하나로 싸잡아서 해석하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어차피 말 안 하는 사람은 말 안 한다. 하는 일마다 직원들의 100%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고 모든 부하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상사는 부하직원들의 침묵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직장에서의 일이란 결국 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말로 소통을 하고 침묵 속에 들어 있는 말도 그런 소통의 일부다. 침묵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넘겨짚는 것은 소통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사와 하는 일을 달가워하는 부하직원은 없다. 이왕 함께 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상사는 부하직원들의 침묵마저도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