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침묵
직장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일이 회의다. 회의의 효율성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느낌은 다르겠지만 회의에서 자유로운 직장인은 거의 없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일주일에 1~2회가 44%로 가장 많고, 3~4회가 26.5%, 5~6회가 15.1% 였다. 반면에 회의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답은 4.6%에 불과했다. 조직의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회의에 참여하는 것이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이다.
그런 일상의 모습 중에는 회의를 이끄는 상사만 열심히 말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눈을 노트에 둔 채 무언가를 쓰기에 바쁜 광경이 있다. 상사는 직원들의 입에서 의견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몇몇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상사들은 적극적이지 못한 직원에 대해 답답해하지만 그런 광경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많은 조직들에서 회의는 그런 모습이다.
이처럼 직원들이 업무에 대한 의견, 아이디어, 지식을 의식적으로 보류하는 현상을 가리켜 조직의 침묵(Organizational Silence)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조직의 침묵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부정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관계 손상에 대한 두려움, 복수 또는 처벌의 두려움, 고립의 두려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래에 생길 일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이다. 불안은 달갑지 않거나 불쾌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거나 기대될 때 느끼는 감정이다. 회의에서의 침묵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쾌하고 달갑지 않은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인 셈이다.
조직의 침묵은 조직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조직 구성원의 침묵은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 이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 조직은 혁신을 하거나 창발성을 드러내기가 어렵게 된다. 조직의 침묵이 깊어지면 조직의 일에 무관심한, 또는 무관심하게 보이는 구성원이 늘어나게 된다. 구성원들의 사기와 충성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고 그저 '굴러가는 데로 따라가는' 태도가 만연해진다. 연구에 따르면 조직의 침묵은 구성원들의 정신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많은 리더들이 조직의 침묵이 조직과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를 못한다. 그저 침묵하는 구성원들에 대해 생각이 없거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판단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남 탓을 하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 편의주의식 발상은 조직의 침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은 사라지고, 조직의 역동성은 잦아들며, 구성원 간의 시너지는 물 건너가게 된다.
학자들은 조직이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면 직원도 그에 대한 보답으로 침묵을 깬다는 논리를 대안의 큰 틀로 제시한다. 조직의 침묵은 어디까지나 조직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라는 원론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런 거시적 대안이 조직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 못하는 중간관리자에게 적용되기는 어렵다. 당장 부서 회의에서의 침묵도 깨지 못하는 처지에 조직 차원에서의 대안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조직의 침묵을 깨기 위해 조직은 조직 차원에서, 리더는 리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침묵의 회의
글 시작에서 말했듯이 직장인이 조직의 침묵을 가장 일상적으로 접하는 자리는 회의다. 중간관리자급 리더들이 조직의 침묵을 대하는 최선의 행동은 바로 '침묵의 회의'를 탈피하는 것이다. 회의 분위기가 유연해지면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까지도 달라진다. 부서 단위에서 가장 공적인 자리인 회의에서 입을 열 수 있다면 그 외의 일상적인 환경에서 의견을 게재하고 생각을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회의 자리에서의 침묵을 깨는 일은 조직의 환경이나 메커니즘을 고려한 특별 이벤트가 없어도 된다. 조직의 침묵이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두려움을 없애거나 낮추면 그만이다.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부정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떠한 의견이라도 긍정적, 혹은 중립적으로 경청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아무런 논리도 없는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논리에 대해 긍정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사 논리가 부족하다고 해도 "일리 있는 말이네." 정도의 반응은 어렵지 않다. 차별적인 의견이나 반대 의견을 내면 고립될까 봐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이 방법으로 개선이 가능하다.
관계 손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발언이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어른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문제다. 공적인 발언에도 감정이 상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 공적인 발언과 감정 사이의 경계는 확실해야 한다. 직장인의 어른스러움이란 그런 것이다. 리더부터 그런 어른스러운 태도를 실천하고 구성원들에게도 그런 태도를 요구해 전반적인 조직의 분위기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공적인 발언과 감정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어른스러움의 역할이다. 나의 의견으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책임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는 많다. 사람 사이에는 그런 배려의 마음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의식을 공적인 영역에까지 무조건 적용을 하게 되면 공동의 목표 달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관계 손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일과 마찬가지로, 리더는 구성원들이 공적인 발언과 감정 사이의 구분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
의견 개진으로 인한 복수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복수와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적인 발언과 감정의 경계에 대한 구분, 그리고 의견에 대한 책임을 무조건 발언 당사자에게 묻지 않는 조직 구조가 필요하다. 복수는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감정이다. 회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네가 나의 의견에 반대했으니 나도 너의 의견에 무조건 반대를 하겠다거나 나의 말에 대한 너의 반박으로 기분이 상했으니 너의 말에 꼬투리를 잡겠다는 태도가 얕은 복수에 해당된다. 이는 공적인 발언에 감정을 담아두는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리더는 구성원들에게 공적인 발언과 감정을 구분하는 태도를 요구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런 감정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말에 대한 처벌의 가장 흔한 사례는 '책임 지우기'다. 일반적인 책임 지우기는 말을 꺼낸 사람이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업무 영역 안에 있는 일이라면 부담은 좀 되겠지만 정상적인 업무로 받아들이면 된다. 문제는 책임 지우기를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이 처벌의 논리는 이렇다. 누군가의 의견대로 일을 진행했는데 일이 잘못되었으니 의견을 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에서 이런 식으로 처벌의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일의 책임은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져야 한다. 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은 대부분 관리자이므로 책임의 많은 부분도 그들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나 의견을 말했다는 이유로 처벌의 가능성이 생긴다면 말하지 않는 편이 이익이다. 그런 상황에서 입을 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리더는 처벌이라는 불이익이 합리적으로 적용되는 조직 구조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이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입을 열 수 있다.
의미있는 솔선수범
리더는 자신이 이끄는 조직에 침묵의 회의 현상이 발생할 때 구성원들의 생각 없음을 이유로 삼기 쉽다. 그런 결론을 내는 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심리적으로도 편하고 깊은 생각이 필요 없어 몸도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생각이 없어서 말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는 의도된 침묵의 가능성을 염두해야 한다. 자신들이 관여된 업무에 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침묵의 회의를 벗어나는 방법들의 시작점에는 리더가 있다. 모든 조직은 리더의 성향이 반영된다. 구성원들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맞장구쳐주고, 의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감정적인 뒤끝 없는 리더의 성향이 반영된 조직에는 의도된 침묵이 없다. 의견에 뒤따르는 책임을 묻고, 시비를 따지려 들고, 부정적인 반박과 감정싸움에 몰두하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이와 반대다. 부딪치기가 싫어서 입을 열지 않고, 설사 입을 연다고 해도 리더의 성향을 답습하기 마련이다.
리더의 솔선수범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성원들이 리더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행동에 깃들어있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리더 혼자만의 외로운 노력이 되기 쉽다. 행동보다 더 직접적이고 빠른 것이 말이다.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 어떤 목적에서 그런 태도가 필요한지를 충분히 이야기해서 구성원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그런 후에야 그 실천의 가장 앞에 서는 의미가 생긴다. 조직의 침묵이 주는 악영향과 커뮤니케이션의 긍정적 효과를 수긍한다면, 리더는 이 정도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