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열 Dec 26. 2019

직장생활 속 '체리피커' 빌런

체리피커(cherry picker)

체리피커(cherry picker)는 주로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으면서 부가 혜택만 누리는 소비자를 뜻한다. 원래 이 말은 신용카드 산업 분야에서 나왔다고 한다. 신용카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부가서비스 혜택만 누리는 고객을 '케이크에 있는 체리만 쏙 빼먹는 사람'에 빗대어 이렇게 부른다. 쉽게 말해 자기 실속에만 관심이 있어서 상대의 처지나 상황은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다. 우리말로 하면 '깍쟁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체리피커가 꼭 신용카드 업계에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편익만을 챙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직장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편한 일, 능력이 돋보이는 일, 쉽게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일, 책임을 덜 지는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직장생활 속 체리피커다. 이들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익과 편함을 추구한다. 그런 행동이 평판이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본인들도 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눈앞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사실 체리피커들을 대놓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체리피커들은 자신의 손해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대신 남에게 그런 것들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뿐이지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불편을 주기 위한 의도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체리피커의 태도를 당연하다 여기는 마음이 들기도 어렵다. 이성과 논리의 틀에서 이해할 수는 있어도 감정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타협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타협은 각자에게 가장 좋음(최선)을 포기하는 데서 성사가 된다. 그런데 체리피커들은 자신의 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서라도 체리를 먼저 집어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깍쟁이 같은 심보에 심정적으로 동의를 하기가 영 껄끄러운 것이다.


집단 속 체리피커

특히 집단에서 체리피커의 행동은 이성이나 시스템으로 제어하기가 어렵다. 1대 1의 관계에서 상대가 나에게 편함이나 이익만을 얻으려 하고 자신은 약간의 불편함과 손해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고 하자. 특별한 계약이나 약속이 깔려있지 않은 이상 그런 관계는 유지가 어렵다. 상대가 나를 '뜯어먹는다'거나 '호구'로 여긴다는 판단은 오히려 관계를 끊게 만든는 구실이 된다. 사랑의 열정이 이성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 정도가 아니라면 이익만 챙기려 드는 사람과의 관계는 '손절'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집단에서의 관계에서 체리피커에 대해 단호하기는 쉽지 않다. 손절 같은 것은 개인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집단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체리피커가 감수하지 않은 손해나 불편을 나머지 사람이 나눠야 한다. 동료직원의 갑작스러운 결근으로 업무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메우느라 온 팀원들이 야근을 불사하며 일해야 하는 판국에 자기 일 끝났다고 칼퇴근하는 직원이 있다고 하자. 그 직원을 이성과 논리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일이 끝나서 집에 간다는 사실 자체는 적어도 직장이라는 곳에서는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희생은 공감과 이해를 전제로 한 자발적인 행위여야 한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공감과 이해의 부족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을 하거나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관계에서는 공감과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를 끊거나 비난을 할 수는 없다. 직장을 예로 들면, 상대의 깍쟁이 짓이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은 목표를 위해 일하는 동료 직원이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관계를 끊으려면 직장을 떠나야 한다. 체리피커의 행동이 시스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비판도 하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직장생활에서 만나는 수많은 '빌런' 중에 하나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고작이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체리피커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편함(안락)이나 실속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것들이 방해를 받는 것은 체리피커에게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체리피커는 그런 '희생'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느니 관계를 끊어서 불편을 제거하는 쪽을 택한다. 동료직원의 업무공백을 메우기 위해 팀원들이 야근을 불사하는 상황에서 자기 일 끝났다고 휑하니 가버리는 사람은 '연대', '공감' 같은 관계의 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체리피커는 관계가 주는 의미보다는 관계에서 얻는 편함이나 안락함, 실속 따위의 가치에 중심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체리피커에 어울리는 동양의 말을 찾는다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 혼기가 찬 처녀가 있어 두 명의 남자를 소개받았다. 동쪽에 사는 사내는 돈이 많은데 못생겼고, 서쪽에 사는 사내는 가난하지만 인물이 좋았다. 동쪽 사내가 좋으면 오른쪽 어깨를, 서쪽 사내가 좋으면 왼쪽 어깨를 벗으라고 하자 처녀는 양쪽 어깨를 모두 벗었다. 무슨 뜻이냐 했더니 처녀는 밥은 동쪽 집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대답했다. 동쪽에서 밥 먹고, 서쪽에서 잠잔다는 뜻의 동가식서가숙은 여기에서 나왔다.


동가식서가숙의 주인공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만족감을 모두 얻으려고 했다. 사람이라면 둘 다 놓치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아주 솔직하고 '쿨'한 대답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처녀의 대답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배곯는 것과 못생긴 사람과 살을 섞는 불편 중에 하나라도 감수하기 싫다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혼인도 관계의 한 가지다. 관계에서 불편이나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동가식서가숙 하려는 그 처녀도 일종의 체리피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의미의 관계, 가치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항상 안락하고 편안하지만은 않다. 관계란 성향, 취향, 성격, 경험, 기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얽혀서 감정을 나누는 일이다. 그런 와중에 불편이 생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불편을 어느 정도 감당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계의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불편과 손해를 이해하고 참아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체리피커는 이익과 편함을 위해 관계의 단절조차 감수하는 매우 쿨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관계를 과감하게 단절하는 사람을 쿨하다고 하고, 결국은 이기주의자가 승리한다고 말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체리피커는 관계에 있어서는 쿨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기주의자인 것이다. 직장에서 체리피커가 살아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이기심과 쿨함은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다. 여기에 더해 꼴 보기 싫은 체리피커들의 태도와 행동을 현실적인 이기주의와 쿨함으로 등치 시키는 사람들의 의식도 있다. 그래서 체리피커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맛난 체리를 재빨리 빼먹는 행동은 잠시의 기쁨일 뿐이다. 관계의 소중함은 관계가 주는 실속이나 가치에만 있지 않다. 관계 맺기를 많이 경험할수록 우리는 의미 있는 관계에 더 의지하게 된다. 당장에는 이익만을 따먹으려 드는 체리피커나 어떤 불편함이나 손해도 감수할 생각이 없는 동가식서가숙의 깍쟁이가 실속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낫다.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과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런 때가 왔을 때 곁에 누군가가 남아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면 관계에서의 가치와 의미 중 어느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는 답이 나와 있다.


모든 빌런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속만을 챙기는 체리피커를 빌런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적인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도 될지 모른다. 미움 좀 받으면 어떠냐고, 욕 좀 먹으면 그만이라 생각해도 된다. 그마저 감당하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직장은 다르다. 주변 사람들의 감정은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 직장에서는 평판도 능력이다. 당장은 실속을 차리는 일이 기분 좋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제 능력을 깎아먹는 일이다. 결국 직장생활 속 체리피커는 눈 앞에 이득밖에 볼 줄 모르는, 안경이 필요한 근시안 빌런인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침묵의 회의'를 벗어나기 위한 리더의 역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