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유행
기업계에는 '호칭파괴'라는 아주 오래된 유행이 있다. 좀 잘 나간다 하는 기업이 호칭파괴를 들고 나오면 너도 나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가 또 잠잠해지는가 싶으면 다시 어떤 기업이 호칭파괴를 들고 나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CJ그룹이 2000년부터 '님'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직원들끼리 호칭하기 시작했으니 대략 20년 가까이 된 유행이다. 최근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이 호칭파괴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CJ그룹 이후 알만한 기업들은 한 번쯤 호칭파괴라는 '떡밥'을 건드렸다. 목적도 한결같다. 수직적 기업 문화를 수평적 기업 문화로 탈바꿈하고 효율성과 창의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한편에서는 기업의 호칭파괴 문화 도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기업 내에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구축하여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조직원의 창의성을 배가하며, 조직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는 호칭파괴만 한 것이 없다고들 한다. 이런 결과들이 모여 종전의 수직적 기업 문화 대신 수평적 기업 문화를 정착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는다.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지고 덕분에 창의성이 배가되었다는 신문 기사들도 보인다. 심지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혁신의 시작, 직장 내 민주주의 완성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 정도면 호칭파괴가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전가의 보도라는 생각까지 든다.
일각에서는 호칭파괴가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한화그룹의 경우 2012년에 직급 대신 사원은 'OO 씨'라고 부르고 대리부터 부장까지 '매니저'라고 불렀다가 2015년에 원래 체제로 돌아갔다. KT도 2009년부터 5년 동안 직급 대신 '매니저'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결국 기존 체제로 변경하고야 말았다. 아마 신문에 나올 정도로 주목받지 못하는 중소기업에서도 이런 시도와 시행착오는 숱하게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실패 사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호칭파괴의 의의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분명 그 나름대로의 상징성과 실효성을 갖기 때문에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도 호칭파괴의 바람을 탔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칭파괴의 한계
호칭파괴의 형태는 시행하는 기업마다 조금씩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이름과 직함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호칭을 부여하는 것이다. 멋져 보여서 그러는 것인지 심오한 철학적 동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어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홍길동 대리'가 '마이클'이 되고 '성춘향 과장'이 '엘리자베스'가 되는 식이다. 직급 대신에 '매니저(SK)', '프로(제일기획)' 같은 통일된 직함을 쓰기도 한다. 그 외에도 별명을 부르거나 직급을 빼고 이름 뒤에 '님', '씨'를 붙여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기업 문화 장착이라는 목적을 놓고 보면 유연근무제, 자율복장, 자율 좌석 같은 것들도 유행하는 수단들이다. 하지만 호칭파괴에 비길 것이 못된다. 대부분의 기업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업 문화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바탕에 두고 있다. 수직적 위계질서는 직원을 직급으로 구분하며, 그에 따라 직원들은 서로를 직급으로 호칭하게 된다. 한 조직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구성원들이 직급으로 서로를 호칭하면서 수직적 위계질서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결국 호칭파괴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는 선봉이 되는 셈이다.
한 집단 안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성원들의 의식 형태를 규정짓는다. 기업의 이데올로기가 수직적 위계질서에 갇혀 있으면 구성원의 의식 또한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호칭파괴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직 구성원들의 의식을 가둬놓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이데올로기를 깨버리는 것이다. 수직적인 질서가 허물어진 자리는 당연히 수평적인 질서가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호칭은 수직적 위계질서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할 뿐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호칭을 없애거나 바꾸어 부르는 것만으로는 수직적 구조가 사라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홍길동 대리'가 호칭파괴를 만나면 '마이클'이 되거나 '홍프로', '길동님'이 된다. 하지만 직급 체계나 연공서열이 없어지지 않은 이상 '마이클', '홍프로', '길동님'에는 '홍길동 대리'라는 의미가 여전히 살아있게 된다. 어제까지 부장이었던 'OO 씨'라고 부른다고 해서 평사원과 부장의 관계가 수평적이 되지는 않는다. 직급 체계와 연공서열이 존재하는 한 같은 '씨'로 불리는 사람 사이에도 여전히 위아래가 존재하는 것이다. 직급이나 연공서열은 수직적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실질적 체계다. 이 실질적 체계를 없애지 않고 호칭만 다르게 부르는 것은 '새로운 호칭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호칭파괴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그저 어떻게 부르는가, 어떻게 불리는가에만 신경 썼다. 직급을 빼고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부르면 자연스럽게 수평적 구조가 형성되고 그것이 수평적 기업 문화를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말을 한다고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야 반말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호칭파괴에 직급파괴가 1+1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LG전자와 LG유플러스는 기존 5단계였던 직급 체계를 3단계로 바꾸었고 삼성전자는 7단계였던 직급 체계를 4단계의 커리어레벨로 줄였다. SK는 직급 체계를 2단계로 줄였고 SK하이닉스도 3단계로 변경했다.
사실 '직급파괴'라고 하기에는 낯간지럽다. 줄인 것과 없앤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렇게라도 해서 호칭파괴만으로 달성하지 못한 수평적 조직구조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알아줄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직급체계를 간소화하고 호칭에서 직급을 뺀다고 해서 권력의 역학마저 깰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프로'인데 박 프로가 이프로에게 결제를 받고, 같은 '매니저'인데 이 매니저가 최 매니저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면 위계질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질서는 권한과 책임을 차등하여 구분한다. 어떤 식으로든 권한과 책임이 상하로 구분되어 있다면 둘의 관계는 결코 수평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일간지 기사 제목이 있다. "홍길동 님, 까라면 까세요"다. 결국 호칭을 파괴한다고 해서, 직급 체계를 간소화한다고 해서 직원들 사이에 수평적 관계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라는 결론만이 남는다.
호칭파괴의 핵심
취업포털 사이트인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호칭파괴를 도입하지 않는 이유 1위가 '호칭만으로 상명하복의 조직문화 개선이 어려워서(37.7%)'라는 응답이었다. 그리고 '불명확한 책임 소재와 업무상 비효율(30.3%)', '승진 등 직원들의 성취동기가 사라져서(15.6%)'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이 응답들을 보면 호칭파괴만으로는 상명하복이라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속성까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통찰임을 알 수 있다. 또, 호칭파괴가 제대로 됐을 때는 권한과 책임을 구분하는 질서가 사라져 업무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점도 염려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호칭도 사라지도 직급의 상징성도 낮아지면 승진과 같은 직원들의 성취동기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도 보인다. 신문 기사들을 보면 수평적인 호칭 제도의 매력을 말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하지만 이 응답을 통해 수평적인 문화에 대해 모든 직장인이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직급 호칭을 없애고 이름 뒤에 '님'을 붙였던 CJ의 경우 승진을 해도 티가 안 나서 아쉬워하는 케이스가 많아 승진 후에 한 달 정도 ~대리님, ~부장님이라고 불러주었다고 한다. 호칭판 파괴했을 뿐 수직적 위계질서가 그대로 살아 있어서 생기는 일이다. 수직적 위계질서를 유지한 채 호칭파괴를 도입하면 이런 모순된 광경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직급을 빼고 대등하게 서로를 호칭한다고 해서 수평적 문화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 직급 체계 간소화, 자율 복장, 근무 시간의 탄력적 운영 같은 수단들을 모조리 가져다 붙여도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직장 내에 수평적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수평적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호칭을 파괴했다고 해서 수평적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발상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CJ그룹의 사원이 이재현 회장을 '이재현 님'이라고 부른다 한들 사원이 회장과 수평적 관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카카오의 직원이 김범수 의장을 브라이언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모든 의장과 직원이 동등한 관계에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수평적 구조가 형성되면 호칭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평적 관계는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인데 상대를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업의 자유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이 그냥 유행이랍시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호칭파괴를 받아들였을 리도 없다. 호칭파괴의 장단점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연구를 하고, 시범 실시를 해보고, 직원들의 의견을 구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호칭파괴가 끌리는 아이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호칭파괴만으로 수평적 기업 문화가 형성되리라 착각해서는 안된다. 호칭파괴를 깊게 파고 들어가면 직원들 간의 수직적인 관계라는 핵심에 다다르게 된다. 그 핵심을 뒤흔들지 못하는 호칭파괴는 유행하는 아이템을 하나쯤 걸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멋스러워 보이는 것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