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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May 02. 2019

서울올림픽과 6월 민주항쟁

40대의 연혁 II

대부분의 40대들이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대충이라도 인식하게 된 때는 1980년대 이후다. 40대 후반인 1970년~1972년생은 1970년 대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나머지 40대는 1980년대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국민학교는 국가중심적인 체제를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시스템의 일부 역할을 했으며 그러한 국가의 중심에 있는 통치자를 강조했다. 교실이나 복도, 혹은 교무실에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알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이었던 지금의 40대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은 관심 밖이거나 어른들의 어려운 얘기일 뿐이었다. 그 때의 대통령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 대통령이 되기 전 5.18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실, 99.9%의 찬성률로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나중 일이었다. 


또다른 군사독재 시절이었던 1980년대도 국민학생, 중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40대에게는 그저 '학창시절'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는 호황이었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흑백 텔레비전으로 ‘로버트 태권V’를 보던 아이들에게 컬러 텔레비전을 통해 보이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발전과 반공 사상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른들은 여전히 체제 순응적이었다. 정치 체제가 어떻든 간에 삶의 질은 나아지고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3S(스크린 Screen, 스포츠 Sports, 섹스 Sex) 정책을 펼쳐 사람들의 이목을 정치에서 떼어놓았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으로, 프로야구를 보기 위해 야구장으로, 통금이 없는 밤을 즐기기 위해 시가지로 나선 사람들에게 정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체제 변화에 대한 요구는 커졌다. 대학교가 있던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1980년대 중반의 거리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것이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던 대학생들과 그 앞에서 까만 헬멧을 쓰고 방패와 진압봉을 든 채 대치를 하던 전경들, 하굣길 버스 안에까지 스며들던 최루탄의 메케하고 따끔한 냄새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지금 40대 중반이라 해야 당시에는 중학생이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 리는 없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 언론은 정권에 의해 통제되었고, 몇몇 언론사들은 스스로 알아서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기도 했다. 머리가 여물지 못했던 어린 학생들은 뉴스에 등장하는 시위 장면을 보며 대학생들을 ‘데모꾼’이라고 욕하는 어른들의 혀 차는 소리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런 저항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들 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린 학생들의 몫이 아니었다.


구시대의 종식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1987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불이 붙기를 기다리며 온도를 높여가던 열망의 에너지는 박종철을 만나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한열이라는 도화선을 만나 삽시간에 타올랐다.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은 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도중 숨졌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변명을 했지만 결국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권은 개각까지 단행했지만 높아져만 가는 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이 시위 도중 진압대가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았다. 이한열은 “내일 시청(시위)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전국 각지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메시지가 전두환 정권을 향해 파도처럼 몰아쳤다. 몰릴 대로 몰린 전두환 정권은 군병력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까지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입지는 견고하지 못했다. 한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미국 정부가 반대하고 나섰고, 군(軍)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결국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이던 노태우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6월 민주항쟁’으로 불리게 된 당시의 국민적 저항은 절차적 민주주의 획득이라는 성과를 올리며 승리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라는 시스템을 ‘쟁취’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던 정권교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대중, 김영삼이라는 민주세력의 두 지도자가 단일화에 이르지 못해 결국 1987년 12월에 있었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이어졌던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세력의 잔재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이전 체제보다 온건했다. 세계 경제의 호황을 등에 업고 연평균 8%가 넘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실업률은 2%대로 낮았다.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또,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와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으로 국가의 위상을 세계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 몇 십 년에 비해서는 자유와 번영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마이카(My Car)’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문화적 다양성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한국 상업 음악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해가 노태우 정권의 말기인 1992년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지금의 40대들은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자본주의 체제 논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내몰렸다. 당시 부모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자녀를 좋은 대학교에 진학시켜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열망을 낳았다. 여기에 1980년대 경제 성장에 따른 가계소득의 증가가 더해지면서 대학입시의 열기가 무서울 정도로 타올랐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못 배운 한’과 신분 상승의 열망을 혹독할 정도로 자녀들에게 투사했다. 지금의 40대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명목 아래 밤늦게까지 학교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입시지옥’이라는 자학적인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만 교육열은 꺼질 줄 몰랐다. 뜨거운 교육열은 대학 진학률의 상승을 가져왔다. 지금의 40대 후반이 대학 진학을 했던 1990년대 초 33% 정도였던 대학 진학률은 40대 초반이 대학을 들어가던 1996년~1998년 시기에 60%를 넘어섰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990년을 전후로 학업 스트레스, 성적 경쟁 스트레스에 시달린 학생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일이 잊을만하면 뉴스를 탔다.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고생이 유서에 남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당시 청소년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고 치열한 대학교 입시 경쟁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여고생의 유언을 그대로 딴 제목의 영화가 1989년에 개봉되었고, 가수 안치환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어른들은 '좋은 대학 = 좋은 직업 = 행복한 인생'이라는 등식을 강요했다. 그 등식은 지금도 유효해서 어른이 된 지금의 40대 역시 비록 그 등식에 노골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침묵으로 동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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