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리가 너무도 청량하고 경쾌하여 할말을 잃었다.
내 설레임의 권리를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아서다.
정해진 예산과 가이드북에 의한 철저한 이동계획과 시간대별 동선, 그 곳에서는 꼭 맛보아야 할 맛집들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현지에서 찾아가는 여행방식이 있고, 큰 틀에서만 흐름을 잡고 나머진 현지에서 그때그때 흐름에 맞춰 다니는 여행방식이 있다면 난 후자. 두 여행방식의 호불호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별에서 온 그대 처럼 전자의 여행자는 후자를 따라갈 수 없고, 후자의 여행자는 전자를 이해할 수 없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그곳이 낯선곳에서 오는 설레임 때문이다. 처음만난 이성과 연인이 되기전,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할까? 내가 그아이를 좋아하는게 맞는걸까? 카톡한마디와 이모티콘 하나에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어떻게 답장을 해야될지 밤새워 고민하는"썸(Some)"의 상태, 그것이 여행자의 마음이다.
이미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낸 고백후의 상태와는 분명 다른 긴장감과 설레임이 공존하는 상태다. 이미 다른사람들이 모두 경험하고 그들의 선호에 의해 작성된 여행가이드북과 블로그들을 보고 그들의 마음을 따라가기엔 내 여행이 너무 소중하다. 모두가 못생겼다고 해도 내눈에 이쁜여행, 까놓고 보니 못생겨서 실망하더라도 다른사람손에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열어보는 설레임의 상태가 더 좋다. 그 설레임의 권리를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다.
굴포스(Gullfoss)에서 코끝이 찡해오는 시원한 감동을 맞이한 그날 저녁이었다. 그날 저녁을 그렇게까지 시원하게 보내게 될 줄이야. 바람이 차가워진 탓에 우리는 저녁준비를 위해 서둘러 캠핑장을 찾기로 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보자, 캠핑장도 찾아보고, 오늘저녁 잘 곳도 잡아야지"
주위엔 편의점이 없었다. 이젠 해도 떨어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대충 머릿속에 그려온 그림으로는 이쯤 근처 어딘가에 캠핑장이 있어야 하고, 캠핑장 리셉션에는 장작과 캠핑용 소모품들, 이미 따뜻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캐러반과 캠퍼들이 눈에 여럿 띄었어야 했다.
'어 근데, 왜 아무도 없지?'
이런 내 생각을 미리 읽은 와이프는 물었다.
"여봉? 왜이리 캠핑장이 안보이농?"
"글쎄, 와이래 없지;;;"
뒷말을 줄이며 나는 엑셀을 더 깊이 밟았다. 부우웅, 한참을 달렸는데 여전히 캠핑장은 고사하고 주변에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아이슬란드에서 제일 유명한 드라이빙 코스인 링로드이다. 제주도로치면 올레길, 혹은 해안도로로 5분에 하나씩 편의점이 나왔어야 하는 구간일텐데 도로에 가로등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5시인데 밖을 보니 저녁12시 지난것 같다.
겨우 찾아낸 동네 편의점 하나, 들어가 봤더니 장작도 있고 심지어 가스도 있다.
"우와 드디어 우리가 찾던 거기야!!"
너무 기쁜나머지 급히 가스와 장작, 저녁에 마실 물과 간식을 사면서 웃으면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영어로)
"여기 근처에 캠핑장 있나요?"
"있는데 내년 2월까지 아마 문 닫았을 텐데? 너네 알아보고 온거야?"
"물론이지!(당연히 안알아봤다.) 진짜 안하냐? 보통 12월부터 2월까지는 문닫아. 저 옆에 있는 캠핑장을 봐!"
어두워서 그냥 공터인줄 알았던 그곳은 지금은 명확히 CLOSE한 캠핑장이었다.
"여기 동네가 작아서 여기만 문 닫았을 꺼야, 쫌만 더 가보자! 응 여보?"
"응!! 아직 초저녁도 아냐"
'뭐 어딘가에 우리가 잘수 있는덴 있겠지, 여기만 캠핑장이겠나, 조금만 달려보면 나올꺼야' 하면서 달린지가 벌써 2시간인데 캠핑장은 없었다.
"여보 배고파서 안되겠어, 어디라도 세워서 저녁먹자"
그냥 아무 가로등앞에 차를 세웠다. 차 바로 옆에다 헬리녹스 의자를 피고 장작에 불을 붙였다. 남자라면 한번쯤 들어봤을법한 "MAN vs. WILD"주인공 영국 특수부대 출신의 베어그릴스아저씨는 오지에서도 부싯돌만으로 활활 불을 태우더니 뭐가 안된다. 애써 편의점에서 구매한 가스는 버너규격과 맞지않아서 사용도 못하고 장작은 습기를 먹어서인지 불이 붙을것 같다가도 금방 불씨가 사라져 버렸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보려고 가져온 연습장 삼분의 일을 태우고 장작불 같은 모양이 만들어 졌다. 가이드북이 있었으면 오늘 도움을 좀 받았겠다.
이제 물을 끓이려고 생수통을 열였더니 "치이익~"하고 이산화탄소가 빠지는 소리가 난다.
"아....."
그 소리가 너무도 경쾌하고 청량하여 우리는 할말을 잃었다. 오늘 저녁은 라면에 톡쏘는 맛까지 더하겠구나. 물이 끓고 짜왕의 리얼한 야채와 너구리의 매콤함에 구수한 누룽지를 더했다. 그 모든 추위가 잊혀지는 맛이다.
식후땡은 역시 커피가 제격이지, 라면을 끓인 냄비를 대충 씻어내고 다시 커피를 끓이긴 위한 물을 올렸다. 긴급한 허기를 채우고 나니 머릿속에서도 이제 주위를 좀 둘러보며 여유를 가지라는 신호를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긴 세상에 없는 파라다이스였다. GPS에 이름도 없는 좌표어디였지만, 장작불을 올린곳이 세상 최고의 레스토랑이었고, 헬리녹스 의자 뒤쪽으로 주차된 차가 오늘밤 묵을 최고급 호텔이었다.
이제 이 주위에서 불빛은 눈앞의 장작불이 전부이다. 간간히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터 마저도 이젠 없어졌고 우리는 두터운 구름에 가린 달빛아래서 아이슬란드 어딘가 자리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