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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생각의 오해:
남의 시선만 의식하며 살았다.

내 기대와 달리 남들은 나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by 이도


스스로 눈치 보며 괴로워한다.

정작 남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저는 글을 쓰기에 앞서, 주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제가 먼저 만남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백수로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제가 꽤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알고 나면 상대방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할 때도 있습니다. 뭔가 제 삶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여러 가지 단어로 저의 근황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단어는 다르더라도 제게 궁금해하는 내용은 사실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말 괜찮냐?'는 것인데요, 그 나이에 백수로 지내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운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를 되물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솔직하게 하는 편입니다. 처음엔 나도 많이 괴롭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 고민과 생각을 거듭했고, 나름대로 삶의 가치관을 세우고 나니 그때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저의 대답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꽤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제 답변을 들은 이들의 표정은 개운치 않아 보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겉으론 이쁜 말로 포장되었지만 핵심은 '제가 속은 말이 아닐 텐데, 그냥 겉치레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괜찮냐고 물어봤던 사람들의 속마음에는 저의 삶이 불행해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나쁜 뜻은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저 웃을 뿐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


저는 앞서 잘 살고 있냐, 괜찮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고, 제가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번듯한 삶'을 살지 않는 저의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꼭 그렇진 않습니다.


저도 많은 기간동은 이 같은 '의심'의 깔린 질문이 부담스러웠고 거북했습니다. 뭔가 내가 잘못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제가 마치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는 전제가 깔린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제 삶은 예외 현상처럼 평가받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나와 동등한 존재인 타인으로부터 자꾸만 저의 삶이 의심받기 시작하면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던 저의 삶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살고 있는데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에, 항상 책과 강연, 그리고 타인과의 상담을 통해 놓치는 부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통찰을 얻곤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지금 사는 삶은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백수'의 삶일 뿐입니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하루 종일 바쁜 업무를 소화하며 경력을 쌓고, 적지 않은 월급을 받는 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해 보이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어쩌면 나의 안부를 물었을 뿐인 '너 정말 괜찮니?'라는 단순한 질문은, 우리 스스로 생각을 거듭해나가며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도록 만듭니다.





초조해지며 불안이 몰려온다


이 정도까지 오면 어제까지 괜찮았던 내 삶은 끔찍한 패배자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계기는 질문 하나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의 효과는 상당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지고 초조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남들처럼 살기보다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보기 위해서 선택했던 시간의 부자라는 지위가, 이제는 직장도 없는 백수의 변명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한가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빨리 직장을 구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당장 제대로 준비한 것이 없다 보니, 구할 수 있는 직장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급여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심리적으로 너무나 쫓기는 입장인지라, 직장만 구할 수 있다면 그런 불만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가 늦지 않게 꿈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사람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환상이나 쫒고 있었다고 자책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운이 따른 덕에 비교적 빨리 직장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직무도, 직장도, 급여도, 만족스러운 부분은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활동이 다시 가능해졌으니 어디 가서 기죽을 일도 없습니다. 또 이전에 생각했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퇴근하고 나서 하면 됩니다. 지금 직장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여기서 경력을 쌓아 이직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제야 한 시름 놓았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그리곤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뒤, 다시 백수 시절 만났던, 그 무례한 질문을 던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만날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먼저 식사 제공을 빌미로 만남을 제안합니다. 번듯하게 살고 있는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자신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주야장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직과 창업 등, 미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마치 최종 임원 면접장을 방불케 하듯 일장연설을 이어나갑니다. 옆에서 누가 봤다면 시장선거 출마 선언을 연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장황한 연설이 끝났고, 이제 나의 이 노력에 대한 존경과 칭찬을 들을 시간이 왔습니다. 그런데 어째 상대방의 반응이 기대와는 조금 다릅니다. 2만 5천 원의 가격 책정 이유를 알 수 없는 샐러드를 먹고 있던 상대방은 포크를 내려놓은 뒤, 나의 연설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근데 어디서 들어본 질문입니다.


"근데, 정말 그걸로 괜찮아?"




질문의 의미에 대한 해석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왜 상대방은 내가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질문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요? 처음에 괜찮냐고 물어본 질문은 제가 백수였기 때문에 했던 질문이지 않았나요?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 맘엔 안 들어도 나름대로 직장도 잡았는데 왜 질문은 여전히 괜찮냐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는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글의 백수가 정말 뛰어난 천재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의 괜찮냐는 말 한마디에 겁먹고 두려움 때문에 허겁지겁 구한 직장이 남들 보기에 괜찮고 번듯한 일자리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취업난에 번듯한 일자리는커녕 예전 같았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곳들도 이젠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러니 상대방의 입장에선 내가 노력한 것보다는 지금 다니는 직장과 직무부터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들어보면 견적이 나오니까요. 견적은 어떻게 낼까요? 일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명이고, 직무도 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경우일 테니까요. 그리고 상대방의 사회 경험에 비춰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수준과 급여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되물어본 괜찮냐는 그 질문은, 사실 알고 보면 정말로 내가 걱정돼서 물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실 '별생각 없이' 그냥 물어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나가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또 제대로 살아가는지를 함께 염려해주고 깊이 고민해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예의상 잘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상대방이 괜찮다고 하면 '아,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물론 지금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상황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 더 살을 붙여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고 자신의 생각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대단한 진심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그냥'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상대방이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질문 하나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하고, 또 시간을 낭비하며 괴로운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아마 주변에서 제가 말씀드린 이런 사례를 수도 없이 많이 경험하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한 가지입니다. 중요한데요, 그것은


'내가 아닌 남은 나의 삶에 큰 관심이 없다'

입니다.




네 멋대로 해라.


글로 적어놓고 보면 별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주변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남의 말 한마디에 내 마음과 생각이 순식간에 뒤집혀버리는 이런 경험이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는 가장 큰 원인은 '눈치보기'에서 찾고 있습니다.


너무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이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좋은 뜻에서 해주는 조언도,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해하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나의 삶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은 주체적이지 못할 수밖에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화로 치면 주연 / 감독 / 극본 / 각색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수행하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도 비슷하겠네요. 당연히 총책임자이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촬영하시면 됩니다. 그게 나의 삶이라는 영화가 더욱 값진 작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남들과 비슷하게 만든 영화는 결국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영화라면 조금이라도 더 잘 만든 영화에 관객의 눈길이 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의 영화라면 어떨까요? 경쟁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내용을 볼 수 있는 영화는 오직 여기서만 가능하니까요. 그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장의 제목을 제가 좋아하고,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 뤽 고다르의 1959년작. [네 멋대로 해라]로 정했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보셨으면 좋겠는데요. '제멋대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이 영화가 그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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