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눈치 보지 않으면 욕하는 사회
저는 공공기관과 사기업 양쪽 모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둘 다 망할 걱정은 없는 회사였는데요, 하는 일에 비해선 월급도 적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무지요? 삼성동 코엑스 옆에 있는 건물이었으니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집에서도 지하철로 6 정거장이면 도착했으니까 나쁘진 않았습니다. 왜 갑자기 자랑을 하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퇴사한 이유를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겉으로 보이는 조건은 참 좋은 회사였는데, 단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눈치를 봐야만 하는 문화가 굉장히 강했던 것입니다. 소위 '알아서 기어라'는 것이 불문율처럼 규칙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불문율을 알게 된 것은 바지 때문인데요, 그날따라 빨래가 다 마르지 않아 남은 것은 진한 초록색의 면바지뿐이었습니다. 회사 규정상으로도 자율복장이 명시되어 있고, 또 제 직속 선배도 바쁠 때는 운동복을 입고 출근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심학고 진한 초록 바지를 입고 출근했습니다.
그날 저는 회사 뒤편으로 조용히 불려 갔습니다. 이런 바지는 입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지 마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시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네가 이런 지시에도 따를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겠다.'입니다. 더 쉬운 말로는 '눈치 좀 보면서 살라'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선 회사 규정에 자율복장이라고 되어있지 않냐고 따져 묻는 것이 별 소용없습니다. 저는 알겠다고 했고 내일부터 주의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말을 들은 선배님은 얼굴 표정이 밝아지셨습니다. 잘 생각했다며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꼭 이러지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미래에 주어질 이익'입니다. 지금은 좀 짜증 나겠지만 이제 곧 누구는 어디로 전근 가고, 또 새로 사장님이 바뀌면 뭐가 어떻게 되고, 이번에 성과급은 얼마나 나올 것이며... 등등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만 입 다물고 눈치 잘 보면 너에겐 생각보다 많은 이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번 더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사표를 쓸 때까지는 많은 걱정과 고민이 드니까요. 또한 각자가 사표를 제출하는 고민을 할 때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직의 가능성과 금전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는 다른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고민합니다. 제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좀 달랐는데요, 그건 '앞으로도 계속 눈치 보고 살 것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저는 사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제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표를 쓸 당시에는 삶의 목표가 '눈치를 안 보고 살아도 괜찮은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암묵적인 규칙을 어길까 조마조마해가며 살아가는 것은 저에겐 너무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무서웠던 것은, 언젠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저 암묵적인 규칙과 눈치에 저도 익숙해져 누군가에게 눈치보기를 강요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계획도, 준비된 미래도 없었지만 일단 사표를 썼습니다. 저의 몇 안 되는 장점이 있다면 생각한 것을 실행하는데 그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의 3번째 백수생활은 시작되었고, 이 선택이 지금의 글을 쓰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의 목적은 달성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표를 쓰고 나서 저는 누구의 눈치를 본 적도 없거든요. 물론 무례하게 살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표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와보니, 그동안 제가 지키지 않았다고 욕먹었던 그 무수한 규칙들이 정말 무의미하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규칙들을 잘 지키며 눈치 보고 살았다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자유'를 반납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지금도 제가 큰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욕먹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깨달은 것만 해도 저는 제 삶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아졌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으로 생각을 기록하다.
처음엔 그저 눈치 보는 것이 싫어서 자유를 선택했는데, 시간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질문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그건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이고,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할 때 만족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루 종일 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도 보고, 하루는 휴대폰으로 제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 방법이 자신을 알아보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말이 나온 김에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동영상의 형식은 '인터뷰'에 가깝습니다. 저는 제가 궁금해하는 사항들에 대해서 질문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한 뒤, 동영상으로 저의 생각을 담은 답변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 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혹은 너무나 불안하거나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을 때 등등. 저는 제 내면에 담긴 다양한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영상 촬영을 통해 제가 정말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의식하다 보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버버 하다가 생각한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촬영을 중단한 적이 정말 많았습니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것도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영상도 아닌데 그리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진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평소에 궁금했던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그 대답을 영상으로 기록했습니다. 잘 산다는 것, 행복, 만족감, 사랑, 죽음, 계획, 미래의 삶과 지금의 삶, 가족, 부모님과의 관계, 인간을 대한다는 것, 감정의 소모, 분노와 욕망, 타인에 대한 증오, 하루를 잘 보낸다는 것 등등. 머리에 떠오르는 거의 모든 것들을 비워버린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대답을 하고,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이 반복된 영상 촬영은, 제가 퇴사 후에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통해 저는 제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인지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중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인식 차이
영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자신이 맞긴 하는데, 뭔가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이물감이 순간순간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소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거울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얼굴의 장단점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도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제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또 말을 하면서 눈을 하늘 방향으로 치켜뜬다거나, 오른쪽 손으로 코를 매만지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자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영상 속에 담긴 나의 모습은 내가 맞지만,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낯선 존재이기도 합니다. 흔히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타인은 자주 보고 평가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 동영상 촬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영상 촬영에 의한 자기 객관화 과정이 비단 자신의 모습을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에서 의미가 다한 것은 아닙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나 역시 내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것처럼, 존중과 배려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면, 이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눈치 보는 것에 대해 내가 왜 그렇게나 불편함을 느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눈치를 보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나를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를 존중하기보단, 회사의 규칙과 질서, 그리고 조직사회의 불문율이 나에 대한 존중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이 깔끔하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나 회사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공간에서 일정 수준의 규칙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생각이니까요. 오래전에 읽었지만, 홉스라는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인이 투쟁하는 것보단, 국가라는 거대 권력을 통해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문제는 칼로 무를 썰어내듯 딱 잘라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눈치'라는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비겁한 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도 존중과 배려가 필요한 존재다 맞습니다. 그리고 집단 사회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지켜져야 하는 가치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구분을 내가 나서서 하기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고 내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겉으로 이런 문제를 꺼내지 말고, 알아서 적당히 개인이 손해 보도록 무형의 질서를 만들어 집단의 운영이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자. 이것이 제가 생각한 눈치 보는 것의 정체였습니다.
결국 눈치 본다는 행위 자체가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보다는 집단의 질서유지를 우선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대신 승진, 급여, 등의 유무형의 이득과 보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이런 질서유지의 작동방식이, 연장자와 상급자에게 보다 유리하게 적용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조직에서 한 개인이 존중받을 방법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먼저다. 인간을 존중해야 하며 자신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왔지 않습니까? 현실의 삶과 학습한 내용의 괴리감을 그저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삶은 행복해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 퇴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동영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내면엔 이런 심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 왔습니다. 나라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할 것인지, 혹은 조직의 질서유지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갈 것이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 선택지에서 자신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