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가마솥과 대한민국의 연습문제

by 아침햇살

오늘은 6월 4일, 그리고 어제는 6월 3일이다. 이 당연한 진리를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인생도 그렇고 역사의 흐름도 그렇고, 늘 한 칸씩 밀려가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 임금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임금, 보통 임금이 아니다. 나라의 인재, 착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심지어 쓸 만한 사람까지 18년 동안 가마솥에 넣고 슬슬 끓였다. 백성들은 가마솥을 보며 “저거 내 차례인가?” 하다가, 어떤 이는 통째로, 어떤 이는 허벅지 살만 내놓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두 들고 일어나 혁명을 일으켰다. 이쯤 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아니라 ‘임금님 솥은 백성용 솥’이었던 셈이다.


왕은 죽으면서 “난 괜찮아!”라는 희대의 유언을 남겼지만, 백성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왜냐고? 임금의 아들이 다시 나타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겠다!”며 또다시 백성들을 도마 위 생선처럼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가문의 저주’가 따로 없다. “나는 괜찮아, 너희는 알아서 해라!” 이 얼마나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가


이런 시대에 한 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고향을 이야기할 때마다 광주가 어깨를 흔들고, 가난한 형제들의 피눈물이 가슴에 불을 붙인다고 노래한다. 열아홉에 과부가 된 누님, 한밤중에 남편을 잃고 평생을 울며 살아가는 광주의 누님. 이 이야기는 어느새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곁에서 어깨를 흔들고 있다. 누군가는 “이제 다 지난 일”이라지만, 사실 역사는 늘 반복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가마솥 근처를 맴돌고 있다.


2,500년 전 노자는 “백성에게 예리한 무기가 많아지면 국가는 더 암흑해진다”고 했다. 또 “사람을 죽이는 건 하늘이 맡은 일”이라며, 나무 심는 대목 대신 나무를 심다 손을 다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단군왕검도 “꽃밭에 불 지른 자는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꽃봉오리, 즉 젊은이를 아직 피기도 전에 죽이는 건 천벌감이라는 말씀. 이쯤 되면 우리 민족은 연습문제를 세 번이나 풀었다. 서대문에서 일가가 사라지고, 18년 가마솥의 주인공이 총으로 부부가 끝장나고, 또 다른 연습문제를 풀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은 시험지 앞에 앉은 고3 수험생처럼 진땀을 빼고 있다.


이쯤에서 잠깐, 만약 내가 살고 있는 게 실수가 아니라면, 밤새 일을 하고, 뜨거운 친구를 만나고,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게 실수 아니라면, 왜 나는 아직도 58살 후줄근한 나이로 잡초들만 우글거리는 세상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잡초들만 몰려와서 내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이 현실, 어쩌면 인생은 잡초와의 전쟁이 아닐까? 잡초가 많을수록, 내 인생도 더 질긴 법이다. “내가 잡초라면, 제초제는 누가 뿌리나?”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해본다.


세상에는 파트타임 양심이 넘쳐난다. 필요할 때만 잠깐 켜지는 양심, 마치 편의점 알바처럼 시간제다. 하지만 이제는 풀타임 양심, 나아가 풀타임 행동이 필요한 시대다. 행동은 어렵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건, 사실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도와줬다가 강도한테 찍히면 어쩌지?” 이런 걱정에 종교인 두 명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아웃 오브 컴패션, 즉 ‘측은지심’으로 행동했다. 이쯤 되면, 선한 일도 각오가 필요한 사회가 바로 ‘악한 세상’이다. 착한 일을 하려면 각오부터 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제 우리는 또다시 연습문제 앞에 서 있다. 복수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 한 맺힌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서푼짜리 양심을 풀타임 양심으로, 풀타임 양심을 행동으로, 행동을 다시 기도로, 그리고 다시 행동으로. 이쯤 되면 인생은 ‘양심의 무한 루프’다.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하지만 이 무한 루프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잡초처럼 질기게, 때로는 가마솥에 들어갈 각오로, 때로는 누님의 눈물을 닦아주며.


오늘도 대한민국은 연습문제를 풀고 있다. 가마솥은 여전히 뜨겁고, 잡초는 끈질기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꽃밭에 불을 지르면 천벌을 받는다는 걸, 그리고 잡초를 뽑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걸. 오늘도 우리는 파트타임 양심을 풀타임으로, 행동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난 괜찮아!’라는 임금님처럼 무책임하게 굴지 않는다. 오늘도 잡초와 씨름하며, 연습문제를 풀고,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눈물로 하루를 버틴다.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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