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제자들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들은 사실상 집시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집도 직업도 버리고 떠난 열세 명은 밀밭을 지나며 이삭을 훑어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밥 한 끼를 구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신세였지요. 신학적 거창한 언어를 제거하면, 결국 이들은 자유와 모험, 그리고 하늘의 신비를 좇아 떠난 "방랑 공동체"였습니다. 재정적 보장이 없는 삶, 그것은 곧 언제 배가 고플지 모르는 불안과 동시에, 빵 한 조각에도 깊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집시는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불확실성 속의 자유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는 위험스러운 존재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의 삶에는 문명사회가 잃어버린 "자발적 가난의 자유"가 담겨 있습니다. 시카고 꽃집 교인이 집시 장례식에 꽃을 배달 갔다가 깜짝 놀랐다는 일화처럼, 집시는 죽음조차 축제로 맞이합니다. 권좌와 재물을 모으는 대신, 삶을 모험의 여정으로 본 것이지요.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마지막 댄스파티"였습니다. 우리식 장례문화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어쩌면 더 인간답고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비슷하게, 미 대륙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람이 임종에 이르면 그의 천막으로 몰려가 물건을 모두 가져갑니다. 얼핏 "무정하다" 느껴지지만, 사실은 삶과 죽음을 분명히 구획 짓기 위한 지혜였습니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떠난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들은 공동체적 의식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죽음을 '상실'로 보기보다 '정리'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죽음 수용'의 한 문화적 표현이라 볼 수 있지요.
복음서에서 예수의 마지막 장면은 옷 한 벌조차 '가위바위보'로 나눠 가지는 모습으로 기록됩니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 끝까지 집착 없는 자유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1945년 발견된 베드로복음서의 기록에서는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 뒤에 미소 짓는 예수가 보였다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집시들의 춤 같은 장례 풍경처럼, 죽음 앞에서도 영혼은 자유롭게 웃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지요. 이는 심리학적으로도 깊은 통찰을 줍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사람은 '거리를 두고 보는 자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아야말로 인간을 얽매임에서 해방시킵니다.
모하메드의 임종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아내가 병원비에 쓰려 숨겨놓은 돈이 있다는 것을 알자, 당장 거지에게 주라 명한 이야기 말입니다. 우연히도 그 밤 텐트 밖에 거지가 있었다고 하지요. 이 일화 속에는 사람의 하드웨어(몸)는 얻음으로 살지만, 소프트웨어(영혼)는 내려놓음으로 완성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 중독 사회에서 '내려놓기의 기쁨'은 오히려 가장 심리학적인 자유의 길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시조를 떠올려봅니다. "빈배 저어 오노라." 인생에서 결국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빈배 위에 가득 실린 달빛을 보는 눈, 그것이야말로 무소유의 자유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상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자아, 유머러스하게 말하면 "고기 대신 달빛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지요.
삶은 결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래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처럼, 가진 것이 없어도 자유로울 줄 아는 영혼에게 참된 행복이 열매 맺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