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귀를 통과하는 마음

by 아침햇살


구원과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는 자칫 무겁게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삶을 꿰뚫는 심리적 통찰과 동시에 웃음을 자아내는 인간사의 풍경이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구원을 얻을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친절히 수치를 알려주시지 않았다. 많다, 적다, 전부, 전무 — 네 가지 답변 중 어느 것도 주지 않으시고, 대신 단호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학생이 시험지에 “답은 몇 번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선생이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순간 당혹스럽지만, 곱씹어 보면 그 답변이 훨씬 본질적이다.


구원은 어둠 속 불빛이 다시 켜지는 순간처럼, 물에 빠졌을 때 건져 올려지는 것처럼, 삶의 진창이 맑은 호수가 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고장 난 텔레비전을 고쳐 다시 즐겨보던 드라마를 이어 보는 것 같은 안도감이 구원인 셈이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교회에 들렀다는 이유로 종교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마치 피아노 선생이 제자의 연습소리에 "Oh my God"을 연발했다고 해서 그 선생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오해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흔히 넘어가는 또 하나의 덫은 겉모습의 비슷함에 안주하는 습관이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피아노를 석 달 배웠는데 번스타인처럼 친다고 자랑한 이야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 물었다. “정말 번스타인처럼 연주를 합니까?” 어머니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럼요. 양손으로 치거든요!” 이쯤 되면 웃음이 터지지만, 사실 우리는 질보다 껍데기에 만족하는 이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심리적 태도의 문제로 읽을 수 있다. 삶은 큰 대로처럼 떼 지어 지나가는 대신, 바늘귀에 실을 꿰듯 세밀한 자기 점검을 통해 가는 길이다. 바야지드라고 하는 이슬람 신비가가 처음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기도하다가, 결국 나 하나만 고치게 해달라고 간청하게 된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젊어서 세상을 고치려는 의욕은 물론 멋지지만, 결국 인간이 진짜 바꿀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 이 깨달음은 늦게 올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좁은 문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멈추어 서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의 험담을 들었을 때 “정말일까?” 하고 멈추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헤아리고, “설령 나쁘더라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고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넓은 길 대신 좁은 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고사에서는 친절한 사람, 달변가, 용감한 사람, 위엄 있는 사람을 예로 들며, 그 자질이 모두 훌륭하지만 언제나 그림자가 함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친절도 지나치면 아첨이 되고, 말솜씨도 통제 못하면 공허해진다. 용기 역시 경솔과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결국 좁은 길이란 자질의 크기보다 그것을 얼마나 가슴과 깨달음에 이어 가느냐의 문제이다.


가장 인상적인 예시는 이름 없이 12년 동안 쌀만 씻던 한 제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명예도, 인정을 얻지 못했지만, 쌀알 사이의 소박함 속에서 마음을 단련하고 고요를 배웠다. 마치 반복되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살아내는 그 자체가 진리에 가장 가까운 길임을 보여준다. 반대로 후계자 자리를 노린 제자는 많은 것을 알았지만, 정작 쌀 씻는 손끝에 깃든 깨달음에는 머물지 못했다.


좁은 문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고 가벼운 일상 가운데서 진심을 들여 살아낼 때 열린다. 플라스틱 꽃이 아무리 화려해도 향기를 낼 수 없고 벌과 나비가 머물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향기가 배어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그러니 좁은 문은 먼 길이 아니라 지금 내 발 밑에 있다. 험담할 때 잠시 멈추는 습관, 반복된 일상에서도 가볍게 살아내는 태도, 입술의 종교적 습관 대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그 작은 길들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하게 — 삶이라는 바늘귀에 실을 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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