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보다 “오늘 뭐 먹지?”를 더 자주 묻는다. 세상은 바쁘고, 사람은 지쳐 있고, 정신은 늘 알람처럼 울린다. 하지만 어떤 이는 여전히 묻는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지?” 이 단 하나의 질문 — 원 빅 퀘스쳔(One Big Question) — 이것이 삶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출발점이다.
어느 위대한 스승이 우리 마을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스승이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오?” 마을 사람들이 모른다고 하자 스승은 “그럼 말할 가치가 없지” 하고 가버렸다. 다음 날 스승이 똑같은 질문을 하자 이번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승은 “그럼 말할 필요가 없네” 하고 또 가버렸다. 세 번째 날, 이버에는 마을 사람들이 스승의 똑같은 질문에 절반은 안다고 하고 절반은 모른다고 하자 스승이 말했다. “그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오.” 그리고 다시 가버렸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식이다. 삶의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스승의 장난 같은 메시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단지 ‘앎’을 다시 ‘삶’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브라임 왕은 잠 못 이루던 밤, 지붕 위를 걷는 사람을 보고 “거기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낙타를 잃어버려서 찾는 중이오.” 지붕 위에서 낙타를 찾겠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하지만 그 기묘한 웃음소리가 왕의 마음을 괴롭혔다. 다음 날 왕은 그를 붙잡았다. “여긴 내 궁전이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전엔 당신 아버지가 여기에 살았다더군.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앉아 ‘이게 내 십이오’ 하겠지.”
왕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구나.” 우리는 다들 자기 인생의 궁전에 ‘영원히 머물 이유’를 찾지만, 결국 한시적인 세입자일 뿐이다.
예수도, 부처도, 노자도 결국 같은 말을 했다. “심플하게 살라.” 하지만 현대인은 ‘심플’보다 ‘컴플리케이트’(복잡함)을 더 사랑한다. ‘종교’도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대신,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여인이 결혼 전 임신을 했는데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추궁에 여인은 그 마을의 유명한 스님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누명을 쓴 스님을 여인이 낳은 아이를 그저 “그런가.” 하고 받아서 길렀다. 1년 뒤 진실이 밝혀지고 아이를 돌려달라고 하자 스님은 또 말했다. “그런가.” 이 평온한 한마디는, 어떤 비난으로도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단순함을 보여준다.
요즘 SNS에서 누가 나를 오해하면 우리는 금세 댓글로 반박하고 해명하느라 진을 뺀다. 하지만 그 스님처럼 “그런가.” 하고 미소 한 번 지을 여유가 있다면, 마음의 절반은 이미 해탈이다.
사람은 왜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싶을까. 핫산이 한 젊은이가 여인과 강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젊은이를 타박했다. “젊은 나이에 술병에 여자라니.”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젊은이가 물에 빠진 사람 여섯을 구했고, 술병을 털어 보이니 그 안엔 물, 여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핫산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려 했구나.”
우리는 종종 남을 평가하느라 자기 성찰을 놓친다. 종교적 성숙이란 ‘옳고 그름’의 저울을 내려놓는 일이다.
단테 <신곡>에도 천당도 지옥도 아닌 곳이 있다고 했다. 누구 편에도 끼지 않고 안전하게만 살던 사람들, ‘괜히 나서면 피곤해’ 하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신은 그들을 그 어정쩡한 공간에 두었다. 왜냐하면 ‘참여하지 않음’도 결국 한 가지의 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조용히 참여하고 조용히 물러나라”라고 했다. 나팔을 불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세상은 조금씩 낫게 된다.
종교든 심리든 결국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학문이다. 인생의 해답은 거창하지 않다.
삶은 묻는다.
“너는 지금 무슨 문제로 살아가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은 아직 ‘삶’을 살기 시작하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할 일은 네 가지뿐이다.
첫째, 삶이 던지는 큰 물음을 놓치지 않을 것.
둘째, 존재의 중심에서 느끼는 절박함을 잃지 않을 것.
셋째,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살 것.
넷째, 참여하되 나팔을 불지 말 것.
그렇게 살면,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종교인’이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사람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