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심리학
우리는 모두 “생겨진 사람들”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태어났다. 그날 그 시각, 부모님이 ‘그냥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살짝 억울하다. 태어날 때 사전동의라도 받았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하나님은 그런 프로세스를 운영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울며 계약서에 사인한 셈이다. “예, 이 세상에서 살겠습니다. 끝날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생겨진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물건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이름을 얻는다.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누구 아들, 딸로 불리며 스스로를 확인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면 철학의 거장 데카르트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낄 때는 대부분 배고프거나, 누구한테 서운할 때, 혹은 월급이 밀렸을 때다. 결국 ‘존재한다’는 건 꽤 세속적인 일이다.
하지만 성탄절은 좀 다르다. 그날은 우연히 생긴 사람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지 않은 사람”의 생일이다. 이 말이 약간 어려워 보이지만,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뜻일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생겨난 존재’지만, 예수는 ‘의도된 존재’라는 것. 그는 “그냥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존재’의 날이 아니라, ‘의미의 날’이다.
성경에 보면 그 의미는 아주 심리적으로 풀린다. 한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 천사에게 듣는다. “네가 임신할 거야.” 지금도 그 말은 쇼킹한데, 2000년 전 율법사회에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들을 만한 말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렇게 답한다.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이다.” 이건 신앙 이전에 엄청난 ‘심리적 용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을 앞두고도 “그래요, 그렇게 될 거예요.”라고 말한 사람이기에, 크리스마스는 결국 한 여인의 용기로 시작된 기적이다.
이 대목을 현대적으로 옮기면 이렇다. “당신은 계획에 없던 일을 맡게 될 겁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은 “저요? 아니요!”라고 외치겠지만, 마리아는 “좋아요. 해보죠.”라고 했다. 우리가 성탄절마다 감격하는 이유는, 성탄이야말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순종’이 만들어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심리적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원조가 예수의 어머니였다.
예수가 세상에 오자,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했던 말은 초대 교회의 교리서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매뉴얼이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라. 이건 자기 방어력 0%의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 내면의 ‘공포의 구조’를 건드린 말이다. 우리는 늘 손해 볼까 봐, 이용당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꺾으셨다. "사랑하라, 심지어 원수조차도!" 이건 단순한 종교적 요구가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움을 이길 힘은 또 다른 미움이 아니라, ‘의도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사랑의 실험자’였다. 그가 기적을 행한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가능성을 새로 보여준 실험이었다. 폭풍을 꾸짖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일이 아니라, “사람이 따뜻하게 사랑하면 현실이 변한다”는 메시지를 몸소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웅변이나 시와 달리, 실제로 나무 잎을 흔들고 파도를 잠재웠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탄절은 이렇게 묻는다. “너도 생겨진 사람으로만 살래? 아니면 의미 있는 사람으로 살래?” 우린 매일 피곤하고, 식탁 위의 반찬처럼 ‘비슷비슷하게’ 하루를 반복하지만, 그 속에서도 예수처럼 “왔으며, 간다”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다르게 살아볼 수 있다. 존재(Being)에 집중하기보다 ‘오고 감’(Coming and going)에 집중하는 삶. 이것이 예수가 가르친 삶의 리듬이다. 잠깐 왔다가, 잠깐 사랑하고, 잠깐 웃고, 잠깐 용서하고 떠나는 인생. 짧지만 탄탄하다.
그러니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우연히 태어난 우리가, 우연히 살지 않기 위해 하루쯤은 마음을 멈추고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그날은 하늘이 인간에게 “나는 너를 어여삐 여긴다”라고 선언하신 날이기도 하다. 생각하면, 그 한 문장이 인간의 모든 심리치료를 대체한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긴다.” 이보다 더 치유적인 말이 있을까?
성탄절의 진짜 웃음은 그래서 선물이나 과자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건, ‘의미를 잊고 살던 자신’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 나도 생겨난 대로 살지만, 오늘은 의도적으로 좀 사랑해 보자.” 이 깨달음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작고 유머러스한 기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