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다큐가 이유였습니다만...
배달 서비스도 애용하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은 운동 겸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집 앞 홀 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에 장을 보러 간다. 미리 짜 둔 일주일치 식단에 필요한 여러 재료들을 눈으로 스캔하며 마켓 안을 바삐 오가는 주부의 일상이지만, 내 장바구니 안에는 미묘하게 다른 2가지 세계가 공존한다.
아이가 마실 skim milk (지방 성분을 제거한 일반 우유), 그리고 내가 먹을 Oat Milk(오트 밀크).
타코를 먹고 싶다는 아이의 저녁식사를 위한 90% lean grass fed ground beef (지방성분 10% 미만의, 식물을 먹여 사육한 간 고기) 0.5파운드와 내가 먹을 대체육 Beyond meat(비욘드 미트).
그리고 두부 한 팩, 시금치 한 단, 당근 한 묶음, 버섯 한 팩. 블루베리도 한 팩 집어 든다.
아, 얼마 전에 다 쓴 마요네즈도 하나 사야 하니 양념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본다. 일반 마요네즈, 비건 마요네즈 중 "아보카도"로 만든 마요네즈를 집어 든다.
이런 부분들을 신경 쓰며 장을 보는 이유는, 내가 Lacto-ovo-pescatarian으로 분류 가능한 채식인이기 때문이다. 이름도 어려워 보이는 저 이상한 말을 풀어서 쓰자면, [계란과 유제품과 같은 일부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이나 생선이나 해산물은 섭취하는 유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아 무진장 길다...) 뭐 이렇게 주절주절 설명을 많이 해야 하는 이런 유형의 식생활을 어쩌다 시작하게 되었는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채식 라이프의 시작.
때는 바야흐로 2019년 가을.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트라이베카의 한 일본식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네 명은, 모두 '건강'과 '사회'에 관심이 많은 30-40대의 여성이자 아이 엄마인 사람들이었다.
서로 조금씩 다른 듯 비슷한 생활 속, 각자의 가장 큰 차이는 [식습관]에 있었다. 특정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나 문제없이 외식하는데 문제가 없는 사람은 나 하나.아드리안은 유제품, 간장, 고기(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모든 육고기) 먹지 않았고, 코린과 리사는 '고기'를 안 먹은 지 5년 정도 된 페스코 테리언(아래 이미지 참고)이었다.
사람들이 모여하는 이야기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음식과 일상, 아이와 남편, 요즘 핫한 가십들과 재미있는 방송 프로그램들,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와 요즘 선호하는 패션이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 등등....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격하게 수다를 이어가던 중, 아드리안이 최근에 본 신박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재미있는 프로그램 이야기인 줄 알고 듣고 있었는데, 그 다큐를 본 그녀의 남편(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에 준 선수급으로 나갈 정도로 운동을 좋아한다)이 앞으로 고기를 안 먹겠다고 선언했다는 사실도 함께 전했다. 선수급의 운동량이 일상이고, 세계 5대 마라톤 대회 출전이 목표인 그런 그가, 앞으로 동물성 단백질을 먹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소식에 다들 "잠깐! 프로그램 이름이 뭐라고?? "라며 눈을 반짝였다.
바로 그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의 "The Game Changers(한국어 제목: 더 게임 체인저스)"였다.
간단히 이야기를 들어도 내용이 흥미로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과 앉아 함께 시청했다. 채식을 하며 육고기를 먹지 않는 운동선수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 다른 선수들보다 좋은 기량을 선보이는 이유를 매우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증빙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곁에서 보던 남편이 "그러고 보니, 축구선수 호나우두도 흰 살 생선만 단백질원으로 먹는다고 하긴 했다. 아, 조코비치나 비너스 윌리엄스도 채식주의자네...?"라며 종목별 스포츠 슈퍼스타들이 채식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더불어 이어지는 '고기'와 함께 연상되는 '남성다움' 또는 '건강함'이 마케팅을 통해서 학습된 내용일 수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늘어나는 고기 소비량을 위해 생겨나는 물 부족과 환경 문제까지 나아가는 다큐의 내용은 신박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의 다큐를 시청한 뒤.
원래 뭘 하는 데 오랜 시간 뜸 들이기보다는 즉흥으로 일가를 이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육고기(돼지고기, 소고기, 치킨, 들소 등등 모든 땅에서 나는 고기들)를 먹지 않겠다'라고 곁에 있던 남편에게 선언했다. 얼마 후 친구들과의 추수감사절 파티며 이사 가는 친구 송별회며 갖가지 행사가 많던 시즌이라 그것만 끝나고 하지 그러냐는 남편의 제안도 물리치고, 그렇게 나는 단호하게! 급성 채식인이 되었다.
미국이라, 뉴욕이라 가능했을까.
사실, 이렇게 갑자기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 도시의 분위기와 환경이 큰 역할을 했다. 슈퍼에는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대체 식품들이 쉽게 눈에 뜨였고, 잡지 진열대에는 채식요리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들이 항상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개개인의 식습관의 차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기본이고(+남이 뭘 먹던 크게 신경 안 쓰는 분위기도 추가), 알레르기를 포함 개인적인 이유들로 피하는 식재료 등을 눈치 보지 않고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문제의 다큐가 화제에 오른 그 날의 모임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 모두는 각각 피하는 재료들이 있기에 식당 메뉴에 기재된 요리 재료 정보를 토대로 각자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골랐다. 그리고 음식을 고른 뒤에는 먹지 않는 재료가 혹시 조리과정에서 들어가거나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지 각각 테이블 담당 서버와 주문 과정에서 한 번씩 더 확인했다. 일테면 동양 음식에 워낙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간장(Soy sauce)'의 경우 표기는 되어있지 않지만 일식에 밑간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니 물어봐야 했고,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인데 특정 재료(고기)가 이슈인 경우 야채나 해산물로 변경하여 조리해 줄 수 있는지를 셰프에게 문의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주문 시간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담당 서버는 이런 요청과 대답에 매우 익숙했고, 이런 모습은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매우 흔한 모습이었다.
주문을 받는 서버들의 질문.
"못 먹는 음식이 있으실까요?"
"저희 요리에는 000 성분이 주로 사용되는데 혹시 알레르기 없으신지요."
"라테에 우유는 일반 우유로 해도 괜찮으신가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의 답변.
"저는 oooo, xxx, zzz를 못 먹으니 그 재료가 제가 주문한 메뉴에 없는지 한번 더 확인해주실래요?"
"혹시 이 재료를 zzz로 바꿔서 요리가 가능한 지 물어봐주실래요?"
"디 카페인 커피로 라테요. 우유는 아몬드 밀크로 해 주세요."
물론, 처음에 뉴욕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질문들이 번거롭게 느껴졌었고,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던 나와 달리 매우 세세하게 식이습관에 맞춰 오더 하는 사람들을 보며 '엄청 까다롭네'라는 생각을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환경에 익숙해지는 인간인지라 곧 이런 질문에 나 역시 익숙해졌고 세밀하게 쪼개진 모자이크 판으로 큰 그림을 만들어 내듯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나의 취향과 선호도를 알아내기 위해 한 번씩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나의 몸이 좋아하는 것]과, [먹으면 몸이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되돌아보는 일을 나도 모르게 매일 조금씩 반복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리고 꽤 많은 식당들이 적어도 1개 이상의 'Vegan(채식)' 메뉴를 구비하고 있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막연하게나마 '흠.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서는 채식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원래 고기를 매우 무척 사랑하는 편은 아니라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다시는 먹지 않겠어]라고 다짐하고 나니 고기로 인해 비워질 것 같은 칼로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몰려왔다. 평소 삼시 세 끼를 고기를 먹었던 것도 아닌 주제에 '채식'을 하겠다는 다짐만 했거늘, 건강을 위해 다른 음식을 더 먹어야 할 것 같은 착각과 걱정이 커졌다. 내가 그렇게 고기에게 남모르게 정을 엄청 주고 있었는지도 처음 깨달았다. 그 결과 각종 과일들과 빵, 떡 같은 탄수화물류에 대한 섭취와 식탐이 엄청나게 늘어나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불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분명 뭔지 모를 상실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했었다.
Vegan(채식) 메뉴가 별도로 구비되어 있는 식당이 많고, 식물성으로 제조된 햄버거 패티나 소시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미국이고 뉴욕이지만... 나는 한국인이었다. 가까운 가족들과 자주 먹는 한식 속에는 피하기 참 어려운 육류들이 존재했다. 따뜻한 겨울에 호록 호록 먹기 좋은 갈비탕을 만들었다며 초대받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빵을 뜯어먹으며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날도 있었고, 한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서 찾아간 뉴저지의 칼국수 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만두를 아련하게 바라만 보며 아이 입에만 넣어준 날도 있었다. 식물성 원료로 만들어진 육개장 고기나, 백숙 같은 맛을 내는 식물성 소시지는 없다는 사실을 내가 간과했다.
나 혼자만 불편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들의 배려가 필요했다. 다들 여행으로라도 오면 찾아가서 먹는 유명한 스테이크 집은 더 이상 우리 가족의 외식장소가 될 수 없는 점도 가족들에게 좀 미안한 일이 되긴 했다. 굳이 가자고 한다면 못 갈 이유도 없지만, 1인분만 시켜도 엄청나게 나오는 고기 양은 도저히 남편과 아이 의 입 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스테이크 집에 가서 감자와 시금치만 먹는 내가 안쓰러운 그도 서서히 발길을 끊게 되었다. 나와 같은 메뉴로 요리하고 고기 대신 생선을 집어 드는 남편을 볼 때 어딘가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맛있다며 엄마도 한 입 먹어보라 내미는 아이의 손 안 햄버거를 먹는 척 해주지 못할 때 짠하기도 하다.
아, 더 큰일은.....
주부인 나는 매 끼니마다 2가지 식탁을 차려야 했다. 성장 중인 아이를 위한 고기가 들어간 식탁과, 고기가 없는 식탁. 하루 3시 세끼를, 그것도 2가지로 나누어 차린다니. 심히 번거롭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과 아쉬움, 어딘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채식 생활을 1년 반 째 계속 이어오고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든 몇 가지 분명한 이유들이 있었다.
사라진 소화불량과 불면증
워킹맘 시절부터 쭉, 달고 다니던 소화불량. 그리고 미국에 온 뒤 더 심해진 이유 없던 복통은 고기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저녁을 먹은 뒤 소화가 되지 않아 잠이 들어도 이리저리 불편함에 몸을 뒤척이느라 나도 모르게 설치던 밤도 사라졌다. 아침에 느껴지는 개운함은 덤에 하루가 더 활력이 생기니 다른 가족들과의 시간에 더 에너지 넘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운동을 마친 뒤 2-3시간 후에 격하게 몰려오던 피로감이 줄어든 것 역시 신기한 부분 중 하나였다.
당장의 조금의 불편함을 감내하고,
먼 훗날의 더 큰 미안함을 줄이기 위해
나를 서둘러 채식 월드로 향하게 만들었던 부분은 지구'나 '환경오염' 같은 꽤 거시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순도 100% '내 몸뚱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지구를, 동물을, 환경을 걱정하는 이유들로 채식을 시작한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환경'에 대한 걱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기의 대량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환경오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육되는 동물들과 그로 인해 또 생겨나는 질병들에 대해서 읽고 들으며 '미래'를 걱정 중이다. 모두가 지금같이 고기를 소비한다면... 바이러스로 끔찍했던, 그리고 여전히 끔찍한 중인 2020-21년이 우리 삶 속에 수차례도 더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있는 중이다. (궁금하신 분께는 Netflix의 Pandemic 다큐 추천드린다.)
어쩌면, 먼 미래의 환경이 파괴된 디스토피아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설 속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두려워졌다.
2백여 년 전 사람들은 기쁠 때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서로 고기를 사주었다고 한다.
'고기를 사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옛 영상 자료들을 보면 뜨악했다.
요리 프로그램 자료들은 그로테스크의 극치였다. 사람들은 온갖 동물을 온갖 방식으로 먹었다.
지금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정세랑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 수록 단편 '7교시' 중-
그 두려움은, 맛있으니 같이 먹자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무릅쓰고 "저는 안 먹어도 괜찮아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당장의 미안함이, 나중에 너무 상해버린 지구를 아이에게 전해주는 것보다는 덜 미안한 일일 것 같기에.
그렇게, 나는 갑자기 발을 들여놓은 채식(Vegan)이라는 세상을 통해 얼떨결에 지난 모든 시간 내가 먹고, 입고, 쓰며 소비해오던 모든 것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습을 통해 생활 속 전반의 작은 부분들부터 아주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변화시켜 보는 중이기도 하다. 저렴하지만 한 두해 쓰고 버릴 정도의 품질을 가진 물건보다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엄선하여 구매한다. 꼭 사야 한다면 빈티지 제품을 사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도 하고, 아이와 남편의 식탁을 위한 고기를 구매한다면 '건강한 방식 - 자연방목으로 풀을 먹으며 자란 소나 돼지의 고기'를 사도록 한다. 장을 보러 갈 때는 일회용 비닐이 많이 생기지 않도록 장바구니를 지참하고, 가능하면 텀블러를 꼭 가지고 나가본다. 꼭 읽어야 할 책만 사고, 가능한 전자책으로 먼저 읽어보도록 노력한다. 쓰다 남은 음식 재료는, 1회용 비닐백에 휙 넣어두기보다는 씻어서 재사용이 가능한 그릇에 넣어 보관한다.
사실.
계란과 유제품, 그리고 해산물까지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인들에 비한다면, 땅에 발 딛고 사는 고기를 제한하는 수준에 불과한 나의 채식은 걸음마 단계도 아니고 이제 배밀이 단계나 다름없다. 그래도.... 이 지구 상의 76억에 가까운 인구 중 '나 하나라도'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인해 먼 미래에 또 2020-21년 같은 생지옥이 도래할 확률이 1/100000000000000000000.....이라도 줄어들 수 있다면. 내가 원했다는 이유로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세상에 나온 아이가 살 미래의 지구가 여전히 즐겁고 행복한 곳일 수 있다면. 이런 배밀이 같은 어설픈 채식이라도 계속해볼 예정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변에도 조금씩 물어볼 것이다.
"채식, 시작해보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