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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May 31. 2022

기왕이면 다홍치마...는 예쁘지만.

너무 온통 다홍치마만 있으면 좀 그르치 않아요?

오랜만에 볕이 좋은 날.


때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었고, 재택의 잇점을 살려 점심 시간에 뱃속이 아니라 손톱을  개선해 보기로 했다. ( 끼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습성은 이럴  도움이 된다. ) 몸에는 도움이 안되지만, 먹는  즈음 내다 던져버리고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해보기로 한 선택을 따라 집에서 가장 가까운 네일샵을 검색해 찾아갔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북을 정주행 하던 중, 이어폰 배터리가 다 나가버려 어쩔 수 없이 멍때리며 손가락이 갖가지 색으로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네일샵에서 누군가에게 내 손을 맡기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니, 그간 쌓인 피로가 하나씩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가물가물 노곤노곤 쏟아지는 잠 속을 헤메이던 중 하이톤의 목소리가 잠이 확 달아났다.


"아니, 그래서 안 하겠대요…."

"요즘은 중학생 때 하는데 회복이 빠르다던데.."

"아우. 몰라요. 싫대. 이해가 안가."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 이 대화속의 “안 하겠다는” 대상은, 알고보니 내 뒷쪽에 앉아 있던 중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안한다'라고 한 것이 '쌍꺼풀 수술'이라는 것도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어렵지 않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고등학교 정도가 어떻냐고 물어보니, 그것보다 더 일찍하는게 낫다고 해서 하자고 이야기중인데 얘는 무조건 싫대요."


곁에서 말없이 엄마의 말을 듣던 그 학생은, 엄마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네일샵 사장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전, 늦 봄. 뉴욕에서 한국에 출장 온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다가 재미있는 질문을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하나같이 한국 아이들은 이렇게 예쁘고 단정히 하고 다닐 수가 있어?"


이 질문을 던진 그녀는 패션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있으면서 기본적으로 속한 업계와 일의 특성상, 패션에 대해서 유심히 보고 이를 고민하는 습성이 있는 편은 기본. 8살 아들과 4살난 딸이 있는 엄마이기에,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눈이 먼저 갔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아이들을 보고 터져나온 그녀의 질문은.

거꾸로 내가 내가 처음 뉴욕에 갔을 때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아니, 패션의 중심지라는데....애들이 왜 이렇게 다 꼬질꼬질해…????’라는 질문의 반대 버전이기도 했기에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실제, 맨해튼의 아이들보다 서울의 아이들은 더 곱고 화사하게, 때가 타지 않은 옷을, 마치 어른과 같은 스타일로도 입고 있었다. 특히 하교 무렵 아이를 데릴러 가면 마치 학교를 격파하고 온 것 같은 모습으로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하루종일 엄마가 곱게 입혀준 복장 그대로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경이로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던 중에 닿았던 곳은  [멀쩡하게 깨끗한 아이의 모습에 대해 엄마(또는 양육자) 느끼는 책임감]의 영역이었다.

우리집 아이 같아서, 이 밈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ㅎㅎ


아이의 외모 = 엄마의 관리력


아이가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는 것은 [가정에서 엄마의 살뜰한 관리를 잘 받고 있는 아이]라는 인식이 좀 더 강한 곳이 한국이었다. '아이의 복장'이 '아이의 선택'을 의미하는 영역에 머무르기 보다는 '나와 아이'의 복장의 선택에 개인의 선호도 못지 않게 '우리의 몰골이 타인의 눈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곳이 한국이다. 전업주부의 비율이 높고, 이는 아이를 챙기는 몫이 고스란히 엄마의 책임으로 떨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전업 주부의 비율이 높은 것이 여성들의 선택이기라기 보다는, 육아와 양육을 둘러싼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한 경우가 많은 점은 참고가 필요하다.)

출처 : https://www.oecd-ilibrary.org  - 한국을 찾아보시라. 뒤에서부터 찾는 것이 빠르다.


그럼, 이건 꼭 한국에만 국한된 부분일까?

얼마전부터, 출근길에 [You are wearing that?] (한국말로 하면 '너 그걸 옷이라고 입었니?' 즈음이 될까 싶다.) 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바로 이 책속에 등장하는 2000년대 미국에서 이 사회학자가 관찰한 딸과 엄마의 대화 패턴과 그 내용에 대한 분석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There is yet another reason that mothers and daughters cast a critical eye on each other's apperance: Each sees the other as representing her to the world, and women are overwhelmingly judged by appearance. This is urgent for mothers, because once a woman becomes a mother, her value-in the eyes of the world and often in her own eyes as well-resides largely in how she fullfills that role. And her children's appearance is only one of many criteria by which she is judged.  

엄마와 딸들이 서로의 외모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는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모녀 관계에서 엄마와 딸은, 서로가 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외모에 의해서 평가받는다. 한 여자가 엄마가 되면 세상이 가진 기준과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는 새로운 엄마라는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달려있게 되니, 엄마들에게 있어서 딸들의 외모에 대한 문제는 매우 시급해진다. 그리고 한 엄마의 아이들의 겉모습은 그녀를 평가하는 수 많은 잣대중 하나에 불과해진다.

- [ You are wearing that? ] by Deborah Tannen-


2000년대와, 2020년대라는 20년의 갭만 제외한다면 사회 속에서 여성의 외모에 대한 엄격한 평가기준들과 더 나아가 '엄마'가 된 여성에게 그 아이들의 외모까지 평가의 대상으로 놓고 보는 시선은 한국과 미국을 넘어 통하는 구석이 있어보이지 않는가. 정말 신기하게도..그러니 이 것은, 지금의 한국이 좀 더 무게있게 가지고 있는 현상일 뿐, 한국이라 심하고 미국이라 덜하다의 이슈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네일 샵에서 가만히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중학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소녀의 마음이 궁금하던 중, 내 사회 초년생의 기억 속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지금이야 이래도 내얼굴이요, 저래도 내 얼굴이라며 운동이나 열심히 하며 즐거이 살고 있지만, 사춘기도 다 지난 20대 후반에 있었던 이 일은 꽤 오래 내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직장생활을 한 지 6년차 즈음 되었던 어느날.


'과장'이라는 한국 직함을 달고 일하던, 한창 일이 재미있고 열심히 하던 그런 어떤 날이었다. 오래 근무하다 퇴사하시는 분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며 3차까지 이어진 회식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알콜 분해와는 거리가 먼  DNA를 소유한 탓에 회식 다음날도 술냄새를 펑펑 풍기는 스타일이지만, 사무실이라는 딱딱한 공간을 벗어나, 알콜이 선사하는 힘을 빌려 조금은 풀어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기를 좋아했기에, 그 날도 마지막까지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참 좋았던 술 맛은 순식간에 쓰디쓴 한약이 되어 꽤 오래 내 입안을 맴돌았고, 또 꽤 오래 머릿속을 헤집었다. 내 앞에 앉아 계시던 그 분은 평소보다 조금 술이 오른 듯 했는데, 이야기 중 가만히 나와 내 옆의 대리님을 번갈아 보다가 이런 질문을 던지셨었다.


"과장님은 왜 안 고쳤어요?"

"네?안 고쳤냐구요? "

"코요. 나라면 그렇게 생긴 코라면 성형 할 것 같은데.화살코잖아 화살코. A 대리님 봐요 얼마나 예뻐. 저정도는 되어야지."


면전에 대놓고 왜 성형하지 않았냐는 사람도 처음이었지만, '칼을 대야 하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산 적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걸까 싶었다. 아,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데 '성형'은 우선순위에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왜 여태 하지 않았냐'라는 질문이 놀라웠던 것일 수도. (아마도, 그럴만한 돈과, 성형 수술로 말미암아 쉴 수 있는 날들이 있다면 여행을 먼저 생각했을 나라서 그랬을 듯 하다.) 여하튼, 그 날의 온도와 습도, 그 날 그 포장마차의 향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잊지 못할 기억인 것은 맞는 듯 하다.


그날 집에 오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내가, 너무 내 외모에 무심했나?'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 취중에 마구 이야기 할만한 지적할만한(?) 외모를 가지고 살면서도 크게 '성형'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유는 유년 시절 늘상 '우리 공주님,우리 예쁜이'이라 날 불러주던 엄마 덕분이었다. 늘 딸내미를 넘치도록 과하게, 객관성이란 없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마냥 예쁘다고 하는 엄마의 이 말들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덕에 크게 외모에 대해서 컴플렉스 없이 성장했다. 그런데 낯모르는 타인의 한마디로 인해 그 뒤도 한동안 나는, 그 날 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엄마에게는 "내 코가 특이하대. 나 수술해야 할 정도라는데?"라며 묻고, 당시의 남자친구 (현 남편)에게도 "넌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나 좀 고치는게 나을까? "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내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갔다.


'보기 좋은 외모가 아닌 나라서 그 분 눈에는 부족해 보이나.'

'사회에 나오기 전에, 성형 수술을 좀 했어야 하나....'

'왜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얼굴을 수정해 줄 생각은 안했지?'

그간 내가 가져온 나 스스로에 대한 기준과, 부모님이 말해주는 나의 가치를 의심하는 질문들을 이어가는 와중에 심지어는, 왜 우리 부모는 나에게 미리 이런 것들을 미리 미리 사회에 나오기 전에 고쳐주지 않았을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망의 마음도 싹텄다.


겨우, 고작, 타인이 툭 던진 외모에 대한 평가 한마디가 만든 파장은 컸다. 그 말을 계기로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을 꼭꼭 다시 씹어보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을 당연하지 않게 돌아보았으니까.



해외에서 한국을 오래 지켜본, 또는 한국에 와서 아예 살고 있는 외국인들과의 자리에서 한국의 문화와 각종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한 이야기들할 때,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주해야 하는 한국의 경쟁사회를 두고 늘 빠지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다.


Ruthless(무자비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시작하고, 한번의 낙오가 허락되지 않는 그 모든 과정을 두고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마치 게임에서 각 단계를 격파하며 나아가듯 각 단계마다 필요한 '스펙'이라는 것을 쌓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사회 속 여러가지 기준들 중, [외모]는 여러모로 정말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체화한다. 특히 한국에서 외모란....무시하고 산다고 무시할 수 없다고 주어진 가치였기도 했고, 내가 경험했 듯…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써야 한다고 강압 받는 가치이기도 했다. 그러니, 중학생의 딸아이에게 쌍꺼풀 수술을 왜 안하려 하냐고 다그치는 엄마의 말이 온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 스스로 본인이 가진 외모에 대해서 인지를 하기도 전에 먼저 애프터 서비스의 개념으로 성형을 해주는 것이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아이가 상처받고 불이익을 받게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의 마음 역시 이해가 가지는 않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타인의 삶, 외모에 대한 엄격한 잣대와 참견. 특히 나이와 지휘 고하를 막론한 여성의 외모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좀 달라져야 할 부분이라 좀 더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어떨까. 타인의 외모에 대해서 품평을 하고. 내 눈에 보이는 타인의 어떤 모습이 '나의 시선' 안에 존재한다고 해서…그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다면?


나와 다른 삶이 틀린 삶이 아니듯,

나와 다른 누군가의 외모를  틀린 외모라 교정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기로 해본다.

가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체로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고, 그 안에서는 그저 모두 있는 그대로 나름대로 행복한 날이 오지는 않을까라는 공상도 해본다. 왠지 거기서는 어떻게 생긴 누구라도 그 나름 더 행복할 것 같은 느낌.


기왕이면 다홍치마를 나도 좋아한다. 꽃도 더 싱싱하게 피어 있는 것이 예뻐 사서 들고 온다. 그러니 눈 앞에서 말하고 웃는 사람이라면 더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것 역시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겠지. 그러나 아름다운 누군가가 세상이라는 스케치 북에서 붉은 색을 담당하듯, 내가 가진 연한 노란색도, 또 누군가가 가진 하늘색도 그 나름 어우러지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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