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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May 28. 202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롤모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 삶의 주관만이 존재할 뿐.

***이 글에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책을 읽을 예정인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어딘가 기이한 모습의 인어가 바닷속을 헤엄치는 표지를 처음 서점에서 마주하고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도무지 장르를 예측할 수 없는 부제를 보며 그저 의아했었다. 거기에 이미 이 책을 접한 분들의 의견이 크게 양분된다는 느낌을 받으며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라는 생각에 거꾸로 궁금해져 덜컥 주문은 해두었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그리고 그렇게 한 번의 클릭으로 곱게 현관까지 배달온 책은 그대로 책장에 꽂혀 펼쳐지지 않은 채 해를 넘겨 2023년도 흘려보내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러다, 올 해를 시작하며 계획한 적 없었지만 갑자기 다시 한번 찾아온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가장 먼저 손을 뻗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다 읽은 지금, 가만히 질문해 본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몇 년 전부터, 삶이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어떤 흐름에 속할 뿐 그 안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은 영역에 불과하다는...매우 '운명론'적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좋게 말해 운명론적이고, 나쁘게 말해 일종에 체념 같은 이 생각의 흐름 속에서, 그래도 '내가 쥐고 있는 방향타가 있을까? 그리고, 선택이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맞는 방향을 어떻게 향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의 한가운데는, 늘 [롤모델]에 대한 큰 갈증이 남아 있었다.


-


큰 팀의 막내 직원으로 학교 졸업장이 나오기도 전에 시작하게 된 첫 회사에서의 사회생활은.

처음인 누구에게나 그렇듯 녹록지 않았다. 불행이자 다행은, 워낙 크고 역사가 긴 브랜드의 마케팅 팀이었다보니 20대 중반인 나를 제외한 모든 분들이 30대 중반의 고연차인 선배 분들이었다는 점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많은 선배들을 한번에 보며 각양각색의 업무 방식과 직장 생활 방식을 관찰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 분은 메일을 참 깔끔하게 잘 쓰시네..'

'이 분은 늘 화가 나 있으신 듯 하지만, 그래도 본업은 참 잘하신다고 다들 이야기하시네. 정말 일을 [잘]하는 건 뭘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직 저쪽 분야 일은 잘 모르겠지만.... 궁금해지네.'

'상하를 막론하고 늘 존칭어를 써주시는 선배님. 나도 나중에 이분처럼, 어린 직원들을 존중해야지.'


물론 이런저런 생각들의 끝에는 '본받고 싶은 점'도 있었지만,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래서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 당시 쓰던 일기장 제일 뒷 장에 'to be'와 'not to be'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잊지 않으려고 이런 것을 끄적인다 말하니 선배 중 한 분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어머. 그거 데스노트 아니니? 인사부 투서용!"


not to be 리스트에 누가 그랬는지까지 적어두었다면, 정말 데스노트가 되었을까.

지금도 가끔, 그날 선배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웃음이 입가를 삐져나오곤 한다.


인턴 출신의 어설픈 새내기는 곧 실무에 능한 대리가 되었다. 하지만, 나 하나 잘 챙기는 것이 아니라 팀원을 가르치고 키우는 매니저 역할까지 하게 된 어느 시점부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잘'하는 리더인지 알고 싶었다. 특히 이미 '성공했다'라고 평가받는 리더들을 보며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 자리에 올려 두었을까? ' 궁금했다. 다행히 내가 속한 소비재/ 화장품 업계 특성상 여성 리더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볼 수 있었기에 그 안에서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어디서도 배운적 없는 미션들을 해치우며 더더욱 롤모델이 간절했다. '일, 결혼, 육아 '라는 세 가지 공을 어떻게 한 번에 굴리면서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이 알고 싶었다. 뉴욕으로 이사한 뒤, 완전 다른 문화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을 붙들고 같은 주제로 인터뷰의 형태를 빌어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도,  그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의 연장선이었으니까.

https://brunch.co.kr/magazine/motherhoodinnyc


아마,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조던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력(스탠퍼드 초대 학장)의 소유자이자... 자연의 궁극적인 진실을 밝혀낸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인물이 가진 특징과 역사를 잘 알아본다면 [나의 삶]도 달라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 희망의 간절함이 곳곳에 묻어났으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 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난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자신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바보의 표지가 아니라 승리자의 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저자의 말-


그래서, 그에 대한 탐구의 시작점에는 데이비드 조던의 면면에 대해서 선망이 매우 선명하게 엿보였다. 객관적이고자 애쓰지만, 애정이 없이는 시작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충분히 동감이 되었던 것은, 나 또한 어떤 선배들을 보며 그러한 시기를 지났기 때문이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사회적 성공가도에 올라선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는 [자연의 질서]를 밝혀내겠다는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본인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언급된 데이비드 조던의 어록-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결과를 위해 방해로 여겨지는 것은 그 어떤 것이던 해결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본인의 연구에 꼭 필요한 제자 찰리를 계속 활용하기 위해서, 찰리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를 되려 성도착증으로 몰아가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 것도 그의 이런 이면을 보여준다.


데이비드의 이런 성향에 대한 우려를 보이는 사람들과 의견을 함께한 스탠퍼드 부인(스탠퍼드 대학교 창립자 부부 중 아내 측: 제인)이 매우 공. 교. 롭. 게. 도 데이비드가 학교에서 내 쫓길만한 상황과 시기에 하와이에서 갑자기 급사한 것과, 그녀의 죽음에 대한 모든 의문을 빠르게 잠재우기 위해 데이비드가 엄청나게 신속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며, 객관적으로 서술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글 뒤에 숨은 룰루밀러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정말... 이래서... 성공했다고....? 이면의 모습이 이러했다... 고????'를 거듭 질문하지 않았을까.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가던 나 역시 '이거... 전형적인....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라는 생각만이 맴돌았으니까..


이런 데이비드 조던을 일컬어 루서 스피어는 이렇게 말한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조던은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범할 정도로 성공적인 인생뒤에 자리 잡은 것은, 삶에 대한 모범 답안이 아니라.

자기기만과 실패마저 아무렇지 않게 칭찬의 꽃다발로 활용한 무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니.

길 잃은 삶에 좌표가 되어줄 멘토로 그를 바라보던 저자 룰루 밀러의 시각이 그의 기록을 따라가면서 해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더 혼란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접한 수많은 성공의 표상들을 바라보던 그런 마음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선망하며 밑줄 그어가며 읽던 작가가 정치인이 되어 전혀 다른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며 책장에서 그의 책을 모두 꺼내서 폐지함에 버렸던 기억.  

마음을 위로받던 작가가 추악한 성 추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기억.

수많은 여성 직원들을 이끄는 리더가, 사석에서는 "결혼하고 애 낳는 직원들은, 생산성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듣고 존경의 마음을 접은 기억도.

이런 순간들이 떠올랐기에, 치열하게 데이비드의 삶을 짚어 올라가던 룰루밀러의 좌절을 고스란히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내 삶도 그렇게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으로 선망하는 이의 자취를 더듬어간 결과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물고기와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니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그녀는 데이비드 조던이 아닌 답을 찾았을까?

그리고 나는. 나의 답을 찾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아주 오랜 시간 찾아올라 간 롤모델에 대한 답은 그녀의 유년시절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말속에 있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 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p.54 : 작가 룰루밀러의 아버지의 말 중.-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혼란 그 자체라는 것을 룰루밀러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었다. 개미 한 마리 보다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인간으로, 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군가가 이미 지나간 길이 아니라 나의 고민으로 내린 결정들에 의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좋은 대로 살라'고 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처럼.

롤 모델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 룰루밀러는 그녀 나름의 행복을 찾아 그곳에 안착하게 된다. 데이비드 조던은 어찌 되었냐 물으신다면... 이 글 끝에 첨부한 기사를 살짝 먼저 살펴보시기를:)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찾아낸 룰루밀러처럼 누군가가 이미 지난 어떤 길을 찾아, 답일 것 같은 길을 찾는 노력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사회적으로 납득받은 이상향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행복을 찾는 방향으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을 찾아가기로.

그리고 그 시작은,

우선 이렇게 다시 끄적이는 글로부터

하나하나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

* 이 생각의 여정에서. 마무리에 다다를 즈음 접하게 된 영상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함께 얹어봅니다:)

https://youtu.be/oBIo2AyjNMo

*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해서 최근에 드러난 사실로 인해 달라진 스탠포드 대학의 조치에 대한 글.

https://news.stanford.edu/2020/10/07/jordan-agass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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