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을 더 쌓지 못한 이유

화장품을 놓고. 네 손을 잡기로 했기에

by 맨모삼천지교


나는 화장품을 쓰는 사람들이 좋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화장품을 사서 쓰려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고 좋았다.

왜 저 제품을 선택했을까.
저 제품을 사러 오는데 어떤 고민을 했을까
저 제품이 어떤 기능에 매료된 것일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보고, 사람들이 매료되었을 그 무엇이 무엇일지 추측하는 것이 즐거웠다. 다른 소비재도 많지만 예쁘고 향기로운 물건과, 그를 통해서 아름다워지고 싶은 사람들의 고민을 대하고...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을 제안하는 것이 행복했다. 또한, 좋아하는 분야이자 일인 것은 물론,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분야라 유리천장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리고 꽤 많은 존경할만한 여자 사람 선배들을 만나 인생의 좌표를 만들며 따라갈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내가 막 일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지금처럼 한국의 브랜드들이 초강세를 보이는 시장이 아니었던 터라 [한국 소비자들이 진짜 좋은 피부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프랑스나 미국의 좋은 제품을 알리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보람도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추후... 시간이 흐르고 연차가 쌓여, 파리와 뉴욕의 본사로 가는 profit을 알게 된 뒤, 그리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연구한 훌륭한 제품들이 국내사에서 출시되어 사랑받는 것을 보며...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실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인가 심각히 고민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 업계를 떠나거나... 궁극적으로 '일'을 놓고 싶다는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막 산후조리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도, 몇 개월 후의 복직의 순간과 그즈음 론칭할 예정인 신제품의 전략이 어찌 되어 가는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임신&출산 중에 나빠진 허리 덕에 예정에도 없던 병가까지 쓰고 출산으로부터 6개월 후에야 간신히 복직한 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일에 대한 열정이나 열망도 그 전보다는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항심’ 아닌 반항심이 더 작용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일단 내 몸에 너무 화가 났다.


임신 중의 입덧은 뭐 말할 수도 없이 심했고, 이명에 두통에 불면증까지. 가지가지 오만 질병이 임신과 함께 오는 것이라고 아무도 이야기해 준 적 없었다. 회사 일은 산더미고 ‘임신’이라는 내 개인의 사정으로 모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 일테면, 입덧 때문에 아예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던 기간도 있었으니, 팀원들이 나를 대신해서 백업해주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탓을 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상황을 마주하며 그저 약한 체력 탓에 입덧이 심한 것 같이 느껴져 내 몸에 화만 나던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출산하고 나면 뾰로롱! 온전한 ‘인간’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왠 일... 백일 지날 무렵이면 날아다닐 줄 알았던 내 마음과 달리 내 허리는 도통 제 자리를 찾을 줄을 몰랐다. 아이를 들어 올리기는커녕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한 자리에 앉아서도 엉덩이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찔움찔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조금이라도 편안한 자세를 찾아 헤매야 하는.... 그런 상황에 출근은 웬 말이겠는가.

그 결과. 출산휴가 3개월 만에 복직은 물 건너간 이야기였고, 결국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회사에 전하게 되었다. 임신 중 내가 다녔던 회사는 ‘글로벌’ 함을 내세우는 ‘외국계’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출산 후 질병으로 복직이 어려운 상황의 직원에게 [병가]를 내라 해야 하냐, 아니면 [육아휴직]을 내라고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인사부와 한참 이야기를 해야 했던... 그런 회사였다. 병가는 근로자의 임금에 대해서 회사가 부담해야 할 부분이 있기도 하고 (왜 내가 회사의 금전적인 부분까지 걱정해야 했었는지, 사실 돌아보니.. 잘 모르겠다 ㅎㅎ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별걸 다 걱정하고 눈치 보던 그런 시기였다.) 출산 후라 육아 휴직을 쓰는 것이 가능한 상황인데... 회사에서 되려 병가를 권유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유인즉, [육아휴직]을 낸 직원의 사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매장에서 고객 대상 세일즈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경우 경우, 출산 후 총 1년여 까지도 육아 휴직을 쓰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사의 경우 되려 이런 부분에 대한 권리를 구하기 어려운 묘... 한 그런 분위기가 사내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 결과, 멀쩡히 아이를 낳은 사람에게도 ‘육아휴직’을 주고 회사로 복직한 사례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회사 측의 입장이었던 것. 병가던, 육아휴직이던 그 방식이 무엇이든 이미 내 몸과 전투 중인 상황에서 그것까지 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치료하는 상황을 보건대, 복직을 한다면 가능한 시점은 이때가 될 것 같고... 그게 회사 쪽에서 기다려 주시기에 문제가 된다면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나서야 결국 어찌어찌 출산 휴가 3달 + 병가 1달 + 육아휴직 2달로 장장 6개월의 여정 끝에 회사로 돌아갔다.


나를 둘러싼 시선에 화가 났다.

그러나, 응당 일반인도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병가를 쓸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출산’ 과정에서 비롯된 ‘부상’이라는 이유로 더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고작 손목이나 아픈 주제에 병가를 썼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당시 내 직속 상사에게 걸려온 전화에.. 인사부로 발송했던 ‘진단서’를 상사에게 보내고, 그 서류를 기초로 당시 내 상사분이 사장님에게 나의 진단서를 조목조목 설명해야 하는 상황까지 마주하니. 내가 몸담은 회사와 조직과 업계에 대한 마음은 ‘사랑’보다는 ‘오기’에 가깝게 변했던 것 같다. 여성이 이렇게 많이 근무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편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구나 하는 생각.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팀 내에서 유일무이한 ‘아이 엄마’가 된 나를 둘러싼 시선과 상황에 대한 반항심이 나도 모르게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을 향한 반항심이 아닌... 그 상황에 대한 반항심. 나는 거기에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마음이 매일매일 자라는 아이만큼 커갔다.


아이와 가정으로 나의 에너지가 분산되어 ‘분명 전처럼 100이 아닌 60의 에너지로 일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반항하고 싶었고, 아이도 일도 잘 해내는 슈퍼우먼이고 싶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면서 아이를 이유로 지각, 조퇴, 휴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아이 양말이 어느 서랍에 있는지 친정 엄마에게 큰 소리로 통화하며 앉아 있는 엄마이고 싶지 않았다. ‘진짜 애 엄마는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었고, ‘경단녀’에 대한 혐오의 말을 지극히 일상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론, 악착같이 버틴 이 시간의 7할이 이런 마음이었다면... 나머지 3할은 내가 없는 동안 내 몫까지 애쓰며 버틴 것은 물론... 회사의 입장이 아닌 나의 입장에 서서 같이 눈물짓고 응원해준 팀원들 덕분이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온 힘을 쏟아 하루하루 살아냈다.

그리고 내가 전쟁 아닌 전쟁을 집 밖에서 치르고 있는 동안, 아이는 할머니 손에서 잘 자랐다.

아주 빨리. 무럭무럭.

내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들과, 볼 수 없는 수많은 공간 속에서.


한국도 지금은 주 52시간 근무가 도입되어 야근이나 잔업은 줄어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불행히도 내가 워킹맘이던 시절에 그런 제도는 없었더랬다. 그 어느 곳보다 트렌드가 빠르고 신제품이 수없이 쏟아지는 곳이라 그 만큼, 한 달 한 달 쏟아지는 신제품과 변화하는 시장에 맞춤 마케팅 플랜을 시시때때로 수정해야했다. 당연히.. 늘 야근이 일상인 곳. 미팅의 무한궤도를 돌고 나면 할 일은 그대로 고스란히 기다리는 그런 하루 끝에는, 그래도 저녁이면 집에 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졸린 눈이 벌겋도록 나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었다. 남편은 주중에는 3-4시간만 침대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스쳐 지나갔고, 햇살 속에 웃는 아이는 내 핸드폰 카톡 메시지에서만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쩌다 퇴근을 준비하는 저녁에 갑자기 미팅이 잡히면... 그날은 자는 아이 얼굴만 어루만지는 밤이 이어졌다.


다행히 일은 즐거웠고, 재미있었고, 맡는 영역이 넓어졌고, 샐러리는 올라갔고, 인정 받았다. 그 중간에 이직도 했는데...다행히 새 직장의 동료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 거나 아빠였다. 다들 점심시간이면 아이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이로 끝나는 분위기였고, 육아와 가정을 병행하는 상황으로 생기는 돌발 상황에 대해서 다들 너무나 잘 이해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모든 것이 나쁠 게 없었다.


한 가지만 빼고.


내가 고장이 나 버렸다.

늘 그렇듯, 바삐 미팅을 마치고 다 같이 회사 뒤쪽의 가정식 백반 집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입가심이자 만성 수면부족으로 흐려지는 정신을 되살릴 커피까지 들고 돌아와 자리에 앉은 어느 날.

회사 내 자리 앞의 가족사진 속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뚝. 뚝. 뚝.


그 후에도, 멀쩡히 에이전시와 통화하며 미팅 일정을 조율하고...화기 애애하게 조만간 만나서 밥을 먹자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워킹맘들도 다들 그러면서 회사를 다니는 줄 알았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던-아니, 버티던 - 하루하루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한번 걸리기 시작한 감기는 무한궤도에 올랐고, 감기가 걸리면 그다음은 장염이, 이명이, 위염이, 관절염이.... 이어졌고, 이렇게 몸의 곳곳에서 크고 작은 질병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나중에는 많이 걷지도 않는 지하철 출퇴근자의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발 뒤꿈치에 염증이 생겨 한 주에 항생제만 다섯 종류를 먹은 주간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급기야 정기검진을 간 병원에서 몸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요소들이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니, 정작 ‘나’를 신경 쓸 잠깐의 시간도 없었고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 거지로 살면서도 ‘나’를 위해서 쓸 시간은 없는 것이 당연한 워킹맘의 삶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아주 뒤 늦게 고장 난 몸의 한 곳을 수술하는 날짜까지 잡고 나서야, 수도 없이 되뇌던 ‘나만 참으면 다 행복해’와 ‘다들 그러려니’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였는지를 깨달았다.



내 몸의 고장의 원인을 두고,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사실 막연하게나마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나는 엄청난 짝사랑 중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만으로 앓아눕는 병을 일컬어 "상사병"이라고 하는데, 나는 딱 그 상사병이 중증이었다. 하루 중 잠시밖에 못 보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한 채로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일이 재미있다고 해서, 새 직무에 대한 도전이 신이 난다고 해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 이상한 가슴 아픔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에 어린이집 등원 길의 개미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의 곁에서 함께 개미를 세며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아픈 아이를 두고 출근하며 그 뜨거운 머리를 내 손으로 식혀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지금이 최선이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가의 최신 트렌드의 옷을 사는 순간보다는, 무릎이 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아이가 동네 고양이에게 인사하는 순간을 햇살 속에서 함께 하고 싶었고, 일 때문에 가게 되는 최신 핫 플레이스에 앉아있기보다는... 한낮에 놀이터에서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주워 모으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 곁에 있고 싶었다. 이른 저녁에 지는 석양을 같이 바라보며 그 색을 이야기해주고 싶었고, 비 오는 낮에는 같이 놀이터로 뛰어나가 물 웅덩이에서 같이 첨벙이고 싶은 나의 마음은 자라는 아이의 속도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핀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멋들어지게 프레젠테이션 하는 순간의 희열은, 아이가 작은 입으로 못했던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볼 대의 경이로움에는 절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지 오래였지만... 계속 해야 할 선택을 미루어 온 까닭은 이랬다.


부모님 덕에 잘 다닌 대학 학비가 아까웠고, 가정 내에서 필요한 아이의 엄마와 아내의 자리는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가 대신하고 계셨다. 또한, 바깥사람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나를 보는 남편의 어깨는 외벌이를 하는 남편들 보다는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회사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일은 점점 넓어져서 큰 그림을 볼 기회가 많아져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의 나’가 아닌 ‘미래의 나’가 나의 어떤 선택에 잘했다고 이야기할지 알 수 없었다.


수년을 휴직한 후에도 원활히 복귀가 가능한 종류의 직업들이 있다. 누군가 금방 대체할 수 있는 성격의 단순한 일이거나, 반대로 공인된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야들이 보통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십 년을 넘게 해온 일은 그 ‘기술’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현업’에 있을 때뿐인 마케팅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현장으로부터의 멀어짐에 너그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한번 놓고 나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에 더욱 두려워졌던 것 같다.


그 모든 내/외부적인 상황들로 인해 ‘지금 내 사진’이 원하는 것을 무시한 결과, 결국 고장이 나버렸던 것.


그리고, 곧.

고장 싸인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미루고 있던 나에게 마감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깜빡. 깜빡

아이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감을 때도 어딘가 불편해하는 모습이라 월차를 내고 안과를 데려갔더니 눈에는 전혀 이상이 없단다. 그다음에는 손가락 사이가 가렵다며 심하게 긁어 아토피인가 싶어 병원을 갔다. 그저 건선이 조금 있을 뿐... 또 아무 이상이 없단다. 신체적으로는 건강했지만 아이의 마음이 답답하다고, 싫다고, 알아달라고 온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록 아침저녁을 모두 합쳐 하루에 서너 시간도 간신히 인 엄마였지만,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부재가 다른 것들로 잘 채워지는 아이들도 많다는데, 나의 아이는 그 많은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무던하게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씩씩함 보다는, 섬세하고 예민해서 엄마 부재를 아주 크게 느끼는 아이였던 것. 이와 더불어... 부모와, 특히 엄마와 일상 속에서 보내는 시간 속에 생겨나는, ‘척하면 착’하고 그런 식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우리 사이에는 자랄 틈이 없었기에 답답한 아이는 본인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더 울고, 짜증내기 시작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이지만, 주말에 아이와 시간을 보낼 때면 내가 알 수 없는 아이의 세계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게 다가와 '아이가 왜 이렇지. 왜 이렇게 반응하지'를 수도 없이 되뇌던 시간을 넘어, 아이는 모르스 부호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


내가 그 신호를 인지한 순간, 모든 선택은 빨라졌다.


아이의 곁을 지키는 엄마로, 내 지난 과거의 공든 탑을 쌓아 올리는 것은 멈추고... 아이의 손을 잡기로 했다.

미래의 알 수 없는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아는 나의 마음을 생각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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