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1 / 이별의 시간
" 그러니까.... 메건은 그냥 동료라니까?"
"회사는 당신만 다녀? 나도 동료가 뭔지는 알아. 하지만 동료랑, 그것도 이성인 동료량 함께 밤을 새지는 않아! 특히 당신이 신경 쓰는 이성인 동료라면 난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같이 프로젝트 준비하는 중이라고 이야기했잖아."
"근데 그걸 왜 꼭 밤새, 회사에서 해야 하는 거냐고. 당신 회사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 곳인 거... 내가 몰라?"
"아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
"........... 모르겠어.."
침묵이 이어졌다. 팔짱을 낀 팔을 풀고 가만히 어깨를 쓸어보는데.. 정말 마치 손바닥에 가시가 돋친 듯 따끔거렸다. 그는 말없이 책상 위의 우편물을 뒤적거리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다 말고 주머니 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알까.
곤란하거나.. 특히 거짓말을 할 때면 저렇게 자기도 모르게 바지 솔기를 만진다는 걸. 어느새 그의 거짓말을 읽을 정도가 되어 버린 스스로도 새삼 놀라웠지만, 그렇게 그의 제스처로 결국 나의 짐작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더 가슴이 먹먹해왔다.
멀쩡히 있는 내 집을 놔두고 이 곳에서 산 지 벌써 2년이 넘어가니, 이제는 나에게도 또 하나의 집이었는데, 갑자기 이 모든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질감이 살아있는 검은색 하드우드 소재의 주방 선반을 열고 가지런히 놓인 유리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당신 메건하고... 두 주 전에, 워크숍 간다고 하고 둘이 캣스킬에 스키 타러 갔던 것.. 알고 있어. "
들 숨 날 숨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던 그의 어깨의 움직임이 멈췄다.
"왜 알고 있다고 전에 말 안 했어?"
"뭘..?"
"왜 그때 묻지 않았냐고."
"지금 나한테 왜 그때 당신한테 따지지 않았냐고 묻는 거야?"
"아니.. 그게... 그동안 전혀 티가 안 났어서... 묻는 거야"
거짓말을 들킨 사람의 태도 치고는 너무나 뻔뻔하게, 왜 자신에게 더 일찍 묻지 않았냐는 그의 이야기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작은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 지역 기반의 유통회사의 회계팀에 취직해서 2년을 다녔다. 아마, 그대로 머물렀다면 고등학교 동창인 누군가와 결혼하여 이미 아이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짝이었던 로렌이 뉴욕으로 떠나 원하는 분야에 도전해서 화려해 보이는 삶을 사는 모습을 매일같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바라보며... 소심한 내 마음 어딘가에도, 서른 전에 한 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원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자라났다. 때 마침, 뉴욕에서의 생활도 안정되어 다시 연락이 잦아진 로렌의 응원이 더해져, 내 인생에 없던 용기를 내어 2년간의 회사 생활로 모은 전재산을 들고 뉴욕으로 온 것이 벌써 7년 전이었다.
뒤늦게 다시 패션머천다이징 전공으로 다시 대학원을 졸업하고 GAP Inc.(*갭, 올드네이비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아메리칸 캐쥬얼웨어를 만드는 회사) 의 프로모션 팀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을 즈음의 나는, 매일매일이 버티는 삶의 연속이었다. 남들보다 많은 나이에 하나라도 더 경력을 쌓는 게 급했고 큰 회사인지라 회사 내에서의 정규직 채용을 기대해 볼만도 했기에 시작했지만, 레스토랑 홀 서빙보다도 적은 인턴 시급만큼은 정말 쉬워지지 않았다. 한 달에 3 천불씩 하는 브루클린의 작은 스튜디오 월세를 내기에도 어림없는 월급 때문에 주중에는 퇴근 후 베이비시터를, 주말에는 바에서 홀 서빙을 하는 생활이 이어지는 버티는 매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쌓이는 스트레스를 잘 마시지 못하는 술로 해결할 수도 없었던 내게 유일한 단 하나의 유흥은, 일주일에 단 하루 중 두어 시간 나를 위해서 하는 테니스였다.
사실, 당시의 나의 빠듯한 생활비로는 매우 사치 아닌 사치였다.
코트를 빌리는데도, 팀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도 모두 돈덩어리인 이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인간관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이 곳이었기에 적어도 회사 외의 공간에서 어디론가 이어질 인간관계를 위해 간절함으로 놓지 않고 이어나가고 있었다.
스티브를 처음 만났던 날은, 거리가 가까워 자주 가던 집 근처의 테니스장에서 경기가 끝난 뒤 다 같이 근처의 바로 향했던 날이었다. 2층 테라스의 바에서 각자 음료를 하나씩 들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곁에 있던 노아가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더니 그를 우리 무리로 데려왔다. 노아의 친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상반되는 깔끔함에 다들 정말 노아 친구 맞냐는 우스갯소리로 인사를 건넸었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왼쪽 다리는 온통 타투에 단어 하나마다 몸을 흔들거리는 히피같은 노아와 달리 매장에서 막 사서 입고 나온 것 처럼 주름이 살아 있는 인디언 핑크색의 피켓 셔츠에, 무릎 조금 위까지 오는 딱 떨어지는 반바지에 먼지하나 없는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큰 음악 소리에도 꼿꼿이 서서 이야기하는 그였으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다른 두 사람은 의외로 꽤 친한지 노아는 그를 우리에게 소개해주느라 열심히였다. 마침, 그날 처음 본 그 역시 테니스 광이라 그 전날 있었던 조코비치의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다들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헤어지고 난 뒤, 다음날 노아를 통해서 내 연락처를 받아도 되는지 먼저 물어온 것은 그였었다.
그 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그다음에는 네 다섯 번, 그 다음에는 매일매일. 스티브는 아주 서서히 연락의 빈도를 높여왔다.
그리고 한 번의 테니스와 두 번의 점심, 세 번의 저녁식사와 산책.
그 후 이어진 한번의 키스로 친구와 이성 사이 어딘가였던 우리는, 얼마지 않아 연인이 되었다.
사실 그는, 내가 뉴욕에 온 뒤에 마주해야 했던 많은 '남자인 사람'들과는 결이 달랐다. 새로 입학한 학교에서부터 회사까지 - 심지어, 내가 다니던 회사는 편안한 캐주얼이 주종목인 의류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패션' 업계에 종사한다는 점을 온몸으로 어필하는 남성인 동기나 동료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여성보다 훨씬 섬세함을 뽐내는 성 소수자들도 적지 않았고....그런 그들이 더 익숙한 나에게 그는 참으로 '고루한' 그러나 '단정함'을 어필하는 류의 남성이었다. 같은 디자인의 셔츠들을 색상만 다르게 종류별로 사는 것이 확실하다 싶을 정도로 스타일은 매번 거의 변화가 없었고, 편안하게 캐주얼을 입을 때 조차도 무채색의 면티들만 등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적어도 우리의 데이트에는 매 번 다른 이야기와 테마를 준비할 줄 아는 성의 있는 연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나에게 감정적인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뉴욕에 이사 온 뒤 어딘가 늘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던 나에게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뉴욕에서 거의 20년 가까이 산 그, 그리고 만만치 않게 이 도시에 뿌리가 깊은 그의 지인들과 함께 하는 와중에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너무나 따뜻했다. 그래서 마치 그와 보내는 시간들은 마치 나에게 누군가 '이 도시에 있어도 된다' 허가 도장을 찍어주는 것만 같이 느껴졌던 듯 하다. 그래서...사람을 만나고 사귀는데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나 역시도 전에 없이 그와 그의 울타리 내의 사람들을 쉽게 내 생활 속으로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
첫 만남으로부터 두 계절이 지날 즈음의 우리는,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얼마지 않아 두 사람이 있기에 훨씬 편안하고 널찍한 그의 집이 곧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의 면도기 옆에는 나의 머리빗이, 그의 탈모방지 샴푸 곁에는 나의 염색 전용 샴푸가 놓였고, 그의 서랍장 한편에는 나의 주말용 편안한 파자마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었다. 그 날은 여름이 막 다가오는 6월이었고, 브루클린의 내 낡은 원룸의 계약 갱신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인상률을 이야기하는 집주인과 언쟁 중인 그런 오후였다.
브루클린, 특히 내가 살던 지역이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집값이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매 번 고장 나는 수도관의 수리도 잘해주지 않는 집의 월세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는 집주인 할아버지의 요구 덕분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그냥.. 같이 살면 어때? 여기서"
그렇게 우린, 함께 아침을 먹고 각자의 회사로 향하고, 저녁이면 집에서 만나 데이트하는 생활을 즐겼다. 물론,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샐러리를 받는 그의 퇴근은 나보다는 늘 늦었고... 그 비싼 집세를 내고도 그가 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생각보다 그가 많이 바쁘고, 나와의 시간을 위해서 정말 많이 일을 줄이고 시간을 냈었다는 사실 역시, 함께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널찍한 집이 늘 깨끗했던 이유는 일주일에 두 번씩 오는 하우스키퍼 덕분이었고, 그의 셔츠가 늘 깔끔하고 각이 잡혀 있던 이유는 나처럼 매일 집에서 열심히 다림질을 해서가 아니라 세탁소에 모두 맡기기 때문이라는 것도.
고민 끝에, 짐을 챙겨 그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긴 했어도, 나의 집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아직 결혼을 약속한 상태도 아닌 데다, 나의 이케아 가구들이 그의 집에 어울리지도 않았기에. 하지만, 거의 단순히 짐만 보관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 지하철 역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고, 집값은 전보다 더 싼 곳으로 새 집을 얻어 짐을 옮겨두었었다. 그래서 분명, 처음에 생활을 합칠 때만 해도 너무 이 생활에 젖어들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들도 이혼이 쉬운데, 동거는 이별에 그 흔한 서류 작업조차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처음에는 입양되어 처음 온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환경을 살피며 경계하던 내 의지도, 더 좋은 것에 더 쉽고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의 간사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여름이면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도 찌는 듯이 더운 방이 아니라, 운동을 해도 시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서늘한 방이었고.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계단을 뛰어내려 가지 않아도 프런트의 도어맨들이 대신 음식을 받아주었었다. 퇴근길에 지하철 역부터 뒤에 따라오는 노숙자를 경계하며 걷는 대신, 집 근처 공원 곳곳을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저녁은 먹었냐는 안부를 묻는 안전한 밤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리 오래지 않아,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새로운 생활을 당연히 즐기며 지내게 되었었다.
처음 그의 거짓말을 알고도 모른 척했던 것은, 그에게 사실을 확인하기 두려웠던 마음 못지않게...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이 사실이라면 달라지게 될 나의 삶을 다시 마주 볼 부담감도 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의 배신감에 마음이 아픈 것보다 그의 환경과의 이별을 생각해야 하는 나의 마음 역시 이별과 멀지 않았는가 싶어 마음이 씁쓸해지지만, 매 달 내야 하는 월세를 맞추기 위해 잠잘 시간도 쪼개서 일하며 버티던 시기가 그다지 희미하지 않은 나는, 이 이별이라는 상황을 감정으로만 오롯이 바라보기에는 너무 자란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내가 알아버린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는 이 편안해져 버린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용기를 다잡아야 했고, 동시에 마음이 떠난 것이 분명한 그를 잡고 싶은 치졸함을 던져야 했다. 그런데, '미안해'가 아닌 '왜 이제야 이야기를 꺼냈는지' 묻는 그를 보며 내가 너무 늦게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아니면 관계의 시작부터, 우리 사이의 무게 중심축이 그의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도.
택시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놓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현관까지 올라가는 네 개의 계단이 마치 큰 언덕처럼 다가왔다. 큰 여행가방을 세워두기에도 빠듯한, 성인 발 길이 정도의 폭 밖에 안 되는 계단이 낯설게 느껴졌다. 캐리어 2개를 밀어 넣고 나니 어른 한 명이 타기도 버거운 엘리베이터에 몸을 밀어 넣었다. 끼익 거리는 소음이 귀를 건드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나오는 입김은 지금 있는 곳이 건물 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
분명 내 집이지만 열쇠로 문을 여는 것조차 어색한 공간은, 두어 달 전에 다녀갈 때 본모습 그대로였다. 짐을 옮긴 뒤 필요한 것들만 가끔 가져갔던 터라 누가 보았다면 흡사 방금 이사를 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박스들이 곳곳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는 비닐 포장조차 풀지 않은 상태였으니.
마치.
수년 전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날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침대 위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매트리스의 비닐을 다 뜯을 기운도 없어, 비닐의 한쪽만 걷어낸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누워있으니 화장대 위에 놓인 전자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6:59 PM
분명 자정은 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시계 속의 시간은 7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저 시계도 리셋이 필요한 걸까.'
눈을 감았다.
울다 잠든 것도 아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침대 옆 바닥을 딛는 순간 마치 발끝에 추를 달아 지하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다리가 아파왔다. 뭐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방 안에서 눈을 돌려 캐리어를 뒤적거려 출근할만한 옷가지를 꺼내 입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이별을 겪었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이달 말에 내야 하는 아파트 렌트비와 카드값이 미루어질 리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티 나지 않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남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처연해 보이지는 않기로 했다. 트렁크에 들어있느라 구겨진 블라우스를 입은 것을 빼고는 그런대로 평상시 모습 같아 보이기는 한다고 생각하며 간 회사를 들어서는데, 어딘가 평소와 다른 공기에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무언가 평소와 다른데..... 아, 빵 냄새!'
늘 1층 로비를 채우던 빵 내음이 사라진 것. 인근에서 유명한 프랑스 파티셰가 운영하는 이 빵집은 인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프랑스식의 바삭하면서도 찰기 있는 바게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늘 아침이면 같은 건물 안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물론, 인근의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려다준 아이 엄마와 유모들이 몰려들어 건물 밖까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게 만드는 그런 베이커리였다.
그런데, 늘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들던 그 풍성한 버터향이 사라졌던 것.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빵을 사러 왔던 사람들도 다들 허탕을 쳤다는 표정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늘 여름휴가와 주말을 제외하고는 공휴일에도 문을 닫지 않던 곳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았지만, 아무런 고지도 붙어있지 않았다.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사무실에 바로 올라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앞에 많은 직원들이 다들 가방과 노트북을 들고 마치 어디론가 이사 가듯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에는 큰 종이박스에 무언가 잔뜩 가지고 나오던 보스 그리스도 있었다.
"애니, 오늘 사무실 폐쇄야. 얼른 짐 가지고 나와"
"네?"
"확진자가 나왔대. 우리 건물이랑 바로 옆 로스쿨 건물에서. 당분간 출근 못할지도 모르니, 얼른 필요한 것 챙겨"
집을 나와 사무실 책상에 앉으면 어제 있던 모든 일로부터 조금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시 짐을 싸서 창고 같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했다. 바람같이 이미 사무실을 나간 크리스를 뒤로 하고 들어선 사무실 안의 풍경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만난 듯 공포에 질려서 책상 위의 짐이며 서류철들을 박스에 쓸어 넣고 있는 아이린이 있는가 하면, 주변 지인들에게 "우리 회사 확진자 나와서 Shut down한대!"라며 마치 좋은 뉴스라도 되는 냥 쉴 새 없이 전화를 수다를 떨어가며 짐을 챙기는 제이미.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샘플로 있던 프로모션용 버킷백에 샘플로 제작했던 브로슈어들을 가지런히 챙겨 넣고 있던 맥스.
그 곁에서 나 역시 지난번 출장 이후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노트북 가방을 꺼내 대충 손으로 먼지를 쓱 닦아내고, 노트북을 챙겨 넣었다.
'어떻게 되려는 건가... 오랫동안 출근 못하려나.
뭐.. 이참에 집 정리도 하고 잘되었지 뭐.
아, 그런데 오늘까지 컨펌 나야 발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던 4월 프로모션 배너는 어쩌지?
... 집에서 일하려면 당장 오늘 박스들부터 다 열어서 정리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넣어 사무실을 나서니 아직 오전의 차갑고 서늘한 늦겨울 아침의 공기가 코 끝을 스쳤다.
그로부터 두 주가 지나도록, 사무실로의 출근은 불가능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집에 머물러야 했다. 매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와 확진자 숫자도 믿을 수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유령도시 같아진 도시의 풍경은 더 믿을 수 없는 그것이었다. 모두가 마치 누에고치라도 된 듯 실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밖으로 나갈 날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재택으로도 잘 진행이 되던 미팅이나 일들은, 바이러스로 인한 매출 급감이 현실화되는 지표들이 나올 때마다 일의 내용도, 분위기도 점점 심각해졌다. 내가 있던 오프라인 프로모션 팀에서 진행하던 봄 시즌 프로모션용 제작물들은 하루아침에 제작을 할 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뉴욕 본사의 오피스가 폐쇄되기 전에 이미 먼저 락다운(Lock down: 도시내 상업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실내에 머무를 것을 명하는 행정지침) 이 시행된 샌프란시스코 매장들의 경우 이미 매장 휴점 상태였지만 아무도 그런 상황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축제와 올해 말에 있을 대선 투표를 위한 대규모 선거유세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지극히 정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단 일주일 새, 본사가 있는 뉴욕을 포함... 대부분의 주 들이 일체의 상업 활동의 중단을 명하며 동면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처음 2주는 모두가 약간은 얼이 빠진 채로 시간이 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스티브와의 이별로 인한 미칠 것 같은 외로움과 분노보다 당장의 도시의 상황을 확인하고, 완전히 달라진 업무 내용과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더 바빴기에... 그의 이름을 잠시 기억 속에 덮어둘 수 있었다. 더불어, 집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막막하기만 했던 집 정리도 대부분 끝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두어 주가 지나가자 점차 처리해야 할 일들이 중단된 채 기약 없는 대기를 해야 하는 내가 속한 오프라인 팀에서는 구조조정에 대한 걱정스러운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프라인팀과 달리, 온라인 팀은 거꾸로 평소보다 더 정신없는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었다. 불안한 모두를 위로하며 부드럽게 소비를 진작시키는 캠페인을 짜는 동시에, 휴점 상태인 오프라인 매장 내의 재고까지 온라인에서 매출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추가되는 온라인 프로모션 관련 일들은 끝이 없어 보였다.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오프라인팀이 온라인 쪽을 돕는 방식으로 팀을 재편성해보기도 했었지만, 서로의 전문분야가 너무 다르다 보니... 그 한계 역시 명확하여 결국 오프라인 팀의 온라인 팀 지원은 없던 일이 되었다.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나지 않아 대규모 해고를 공지하는 회사들이 늘어났고, 주가는 대공황 수준으로 폭락과 회복을 반복했다. 아무리 기반이 튼튼한 대기업이라 할 수 있는 우리 회사라도,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 것이라는 회의적인 이야기들이 팀원들 사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대상 군에 당연히 안 그래도 조정 중이었던 오프라인 프로모션 담당들이 최우선 포함 대상이라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하루하루 언제 갑자기 날아올지 모르는 해고를 알리는 공지에 대한 걱정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시적인 해고라면 상황이 나아진 다음에 다시 채용을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 자체가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이 상황에 리테일 비즈니스의 시장 자체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었기에 팀원들 모두 이제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우울한 분위기였다.
며칠 뒤.
한창 저녁에 먹을 식사를 준비하던 5월의 첫 주 월요일 저녁.
라디오 뉴스를 틀어놓고 냉동피자를 데우는데 앵커의 말이 들려왔다.
"제이크루와 니먼 마커스가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대규모 감원 바람이 불어닥칠 예정입니다.
이 두 기업에 이어 다음 수순으로 지목되고 있는 회사는 GAP입니다.
GAP은 우선 오늘, 일시적인 자구책으로10%의 인원감축을 공지했습니다"
"땡"
피자를 넣은 전자레인지의 완료음이 방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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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진앙지 중의 진앙지로 불리던 뉴욕에서.
오랜 연인과의 이별에 이어...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게 된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주 Part.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