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모삼천지교 Jul 20. 2020

나와의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from 2020뉴욕

뉴욕 한복판의 복숭아 사람이 말해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성에 대해 말을 건네는 솔직한 사회]

인종, 젠더 등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각 국가의 어른들과 사회가 어떻게 말을 건네는지 알아봅니다. 정책적인 배려부터 유치원, 학교 교육이나 도서관 등 제3의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각 국가에서는 어릴 때부터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도록 어떤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고 있을까요? 앞으로 소개할 해외특파원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여러분의 SNS 속 친구의 숫자는 얼마나 되나요?


음... 저는 이렇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7월 13일 기준 512이네요:)


사실 이 인스타그램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찌어찌 쓰고 있는 글들과, 글에 채 담지 못한 여러 이야기들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만들었던 공개 계정입니다. 그래서 실제 제가 만나 뵌 적 없는 분들이 이 숫자의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그래서 하루는, 이 512의 숫자 중 '실제 제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정말 반갑게 인사하고 근황을 물을만하거나 근황을 꾸준히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어느 정도 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40명 정도가 나오더군요.


아마도, 여럿이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서 무언가를 꾸물꾸물하는 것을 즐기는 제게 , 사람을 사귀고 그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라서 더 그런 듯합니다. 또한, 아이 엄마가 된 뒤... 그리고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아이와 24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가족 외의 인간관계를 위해 사용하는 그 시간과 에너지가 가뭄에 나는 콩보다 더 희귀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안부가 궁금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하루하루 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서 헤아려본 140이라는 숫자도 과연 제대로 유지는 하고 있는가 의문스럽기도 한 요즘이지요.


재미있게도... 바로 이렇게 인간이 유지 가능한 인간관계의 숫자를 부분을 이야기한 한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던바의 숫자(Dunbar's number)]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이자 인류학자인 Rober Dunbar (로버트 던바) 교수의 연구 결과에서 비롯된 이 가설은, 인간이 개인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는 150명 정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의 한계와,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이 깊이 있는 관계를 쌓아가는 타인의 숫자를 한정시킨다는 거죠.

그럼 이 150명의 범주를 넘어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느낄까요?


아마도... 이해와 공감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쓰기 어려운 대상일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의견의 대립과, 분열들은... 바로 이 던바의 숫자만 보아도 쉽게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작은 부족사회와 같은 무리가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최대 숫자를 넘어선 거대한 '국가' 또는 '사회'라는 구조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진 무리들 사이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그런데 이런 거대한 충돌과 그 안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상황들로 인해 변화하는 측면에 있어서 한국은 꽤 오래 열외였던 듯합니다. 우선 '단일민족'이라는 인종적인 특수성과... 너무 많지 않은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줄고 있는) 5천만이라는 인구. 그리고 삼면이 바다라는 특성으로 인해 '한국만의 그 무엇'이 매우 오랜 기간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길가에 가득한 영어 간판과, 글로벌 인재를 뽑는다는 수많은 회사의 채용공고들. 그리고 원한다면 손 끝으로 세계 모든 브랜드 쇼핑이 가능하고 BTS의 노래를 온 지구가 함께 듣는 시대에 이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싶으시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신의 복장이 나에 대한 예의일까
2005년의 봄 동경


스물넷의 봄.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바로 다음날, 동경을 구경하러 함께 간 한국 학생들끼리 처음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게 되었죠. 한국과 비슷한 피부색, 머리색의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 역은, 글씨만 좀 다를 뿐... 전혀 '외국' 같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서 '에이. 괜히 일본으로 지원했나... 외국 사는 기분 하나도 안 나네.'라며 궁시렁대며 막 도착한 지하철에 올라탔죠. 그런데, 그렇게 올라탄 지하철 안에는 어릴 때 자주 보던 일본 만화 속의 등장인물 같은 복장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주로, 만화 속에서 '비행청소년' 또는 '격한 음악을 하는 기타리스트' 즈음에 해당할 것 같은 느낌의 그 학생은 분명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귀와 입술, 그리고 코에는 피어싱이 가득이었고 머리는 왁스를 얼마나 바르면 저렇게 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중력을 무시한 채 360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몰골의 학생에게 자연스럽게 눈이 간 것은 '당연지사' 였지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었던지라, 함께 지하철에 탄 한국 학생들끼리 눈빛으로 '쟤 좀 봐' '대박이다'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비밀리에 쑥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사람 많던 지하철 역과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의 복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우리들 뿐이었습니다.

타인의 복장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이를 어떠한 잣대로 평가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던 것도 우리뿐이었습니다.



2018년 여름 뉴욕


2018년 여름, 미국에 이사온지 얼마 안 된 어느 주말.

맨해튼의 가먼스 디스트릭트(Garment District)를 지나가던 날이었습니다. 인근에 패션 관련 회사들이나 학교들이 있는 것은 물론, 그 부자재들을 많이 파는 곳이라 다른 곳보다 더욱 톡톡 튀는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팔다리는 물론 보이는 얼굴을 제외한 보이는 피부의 모든 부분이 문신으로 가득한 사람, 엉덩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고 가는 아가씨, 한 여름에 털 슬리퍼를 신은 사람과 반대로 몸에 걸친 옷보다 드러낸 부분이 더 많은 사람까지. 특히, 브래지어라는 틀 없이 자유롭게 흔들리는 수많은 유방들을 보며, 내 가슴이 아닌데도 민망해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사람 많은 거리에서.

누군가의 가슴을, 누군가의 살결이, 힙 라인이 드러나 있음을 민망해하고 있는 것은 저와 곁에 있던 남편뿐이더군요. 우리를 제외한 누구도 타인을 쳐다보거나,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전 동경의 지하철 안에 서있던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여름 한국


가수 화사가 공항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고 수천 개의 댓글로 찬반이 오갈 만큼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한국의 현재를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죠.


i. 2019년의 한국은 개인의 복장을 타인을 위한 예의의 범주로 보는 문화가 아직 견고하게 남아 있다는 것

ii. 이에 대한 논의가 격렬한 것을 통해 개인의 복장은 '개인의 삶의 범주에 국한한 이슈'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쑥쑥 자라고 있다는 것을요.


그렇게 한국 밖을 벗어 나와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던 사고와 행동이,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회의 [다양성]을 논하는 기준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부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가정의 형태일수도, 종교나 성별에 대한 이슈일 수도 있습니다. 보다 넓게 보자면 개인이 삶을 살아가며 가지게 되는 개별적인 성에 대한 인지, 인종, 나이, 문화, 사회경제학적 배경, 성적 자기 결정권 등의 모든 요소에 대해서 사회가 가지는 포용력의 정도도 그 기준이 될 수 있죠. 앞선 기억들은, 제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쭉 자라오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해진 문화와 관습, 규정 속에 저도 모르게 [정상이라는 기준]을 정하고 바라보던 것들이 [정상]이라기보다는 [가능한 여러 삶의 형태 중 하나]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던 계기였습니다.


그 후, 과연 내가 태어나 자라온 ‘나의 나라’는 과연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궁금해졌죠.

 

그리고, 들여다보고 싶은 수많은 분야 중.....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 있는 조건인 동시에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변경이 불가능한 “인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어떤지 먼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 인종의 입장에서 삶을 살아내며 새삼 돌아보게 된 부분이었거든요.

인종 관련 권장도서로 학교에서 추천받은 "인종 이야기를 해볼까/ 줄리우스 레스터"

[단일민족]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던 한국은 더 이상 그 단어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사회로 변화 중입니다.  통계청에 들어가 자료를 살짝 찾아보니, 자료가 제공되는 1998년에는 30만 명이 조금 넘던 외국인의 숫자가 2018년 기준으로는 무려 236만 명! 이더군요. (+668% ) 그 결과, 1998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대비 0.8%에 불과하던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숫자는 2018년에는 4.6%로 증가했다네요.

자료 출처: 통계청 / 그래프 by 맨모삼천지교


그럼, 이러한 한국 내 다양한 인종 비중의 증가와 함께... 우리의 이들에 대한 이해도 증가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계 가치 조사라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다른 인종의 사람이 이웃으로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은 응답자 중 34.1퍼센트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시행된 설문에 참여한 OECD14개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스웨덴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응답한 이들이 2.8퍼센트로 한국의 12분의 1 수준이며, 미국에선 '다른 인종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응답자가 5.6퍼센트로 한국의 6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중략)... 미국 유학 경험에 비춰보면 미국인 중 5.6퍼센트가 '다른 인종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더 높을 거예요.

다만 미국인은 적어도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자신의 답변이 인종차별적이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최소한의 교양을, 한국인에 비해 좀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교양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흑인 민권운동을 통해 미국 사회가 습득한 것이겠지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지음]


이건 비단 이 책의 글 속뿐만 아니라 제 기억 속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모 정당의 대표는 아프리카계 유학생에게 '니는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 하고 똑같네'라고 말하는가 하면,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은 자주 무지하고 빈곤한 사람들로 대중문화 속에 등장합니다.


기안 84의 웹툰 '복학왕' 249회(세미나 2) 중, 지저분한 방을 보고도 좋다고 하는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를 묘사한 장면

또한...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숫자의 증가에 따라 함께 증가하는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은 학교 폭력의 대상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는 비율도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다문화 가정 고교생의 20%가 학업을 포기한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하고 입을 다물 수 없었죠.(서울경제신문 2019년 1월 31일 자 , "함께 공부 못해" 따돌림에... 다문화 고교생 20% 학업 포기)


제게 이런 수치들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어쩌면 지금 제가 바로 미국이라는 다른 나라에서 '인종적인 소수자'의 입장에서의 삶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민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은, 이미 오랜 시간 다양한 인종과 그로 인한 문화의 충돌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며 그 문제를 고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 온 사회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처참하게도 이와 같은 인종 갈등에 있어서 '극복했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는 것을 2020년 봄 경찰에 의해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죠. 그러니 오늘 제가 들여다볼 사례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해결사례라기보다는, 해결을 하기 위한 노력 중인 사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지경(-.,-;;)이라는 점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잔인함에 대한 의문과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나라의 생성 자체가 인종으로 인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곳인 만큼... 적어도 이제 막 다양한 문화가 들끓기 시작하는 한국에 '이래서는 안 된다' 또는 '이건 해볼 만하다'라는 예측은 해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 '뉴욕'은 미국 내에서도 Melting pot (멜팅 팟)이라 할 만큼 수많은 인종은 물론, 무려 800개의 언어가 뒤섞이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만큼, 그와 비례하여 생겨날 수 있는 수많은 문제와 상황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곳이죠. 그래서 이 극심한 인종갈등의 한가운데서 새로 사회를 배우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과연 어떤 식으로 사회적인 가이드가 전해 지는지에 집중해보았습니다.

뉴욕 5개 버로우의 상징적인 거리들에 새겨진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Black Lives Matter" 싸인 중, 맨해튼 5번가 트럼프 빌딩 바로 앞의 싸인을 내려다본 이미지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과 함께 격렬한 시위와 폭도들의 습격으로 너덜너덜해진 거리를 비추는 뉴스는. 바이러스로 만신창이가 된 삶에 사회에 대한 실망감과 슬픔을 끼얹으며 으쌰 으쌰 바이러스를 이겨내자던 뉴요커들을 깊은 침묵 속에 가두었었습니다. 정말이지, 당장 내일 지구가 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조용히 불타오르던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과연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였죠.


어른인 우리조차 과연 올바른 해결책이 있는지, 끝은 있을지 막막하게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어른인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죠. 인종을 가리지 않고요.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는, Black Lives Matter는 '흑인'의 생명과 인권에만 초점을 맞춘 운동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 소수자), 난민, 이민자, 무슬림, 여성, 저소득 층, 장애인 등 소외받고 사회적 약자로 취급되는 이들 모두를 생각하고 모두의 삶은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학교가 코로나로 문을 닫은 상황이라 그 모든 소통에 대한 가이드는 학교와 기관으로부터.. 그리고 실행은 부모가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온전히 제3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방식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학교+교사의 아바타로 홈스쿨링을 진행하던 과정에서 그 메시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아이들과 소통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원칙.


단연 중요하게 모든 곳에서 이야기하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솔직하게.

연령별로 아이가 이해할만한 단어와 설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코멘트는 있었지만, 부모가 이야기하고 반응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이를 거울삼아 사회에 대한 눈을 키우는 아이들에게 사실을 감추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부끄러운 사회의 민낯이고, 심지어 미국 대통령 조차 납득 불가능한 코멘트를 트위터로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문제를 마주 보고 이야기할 것을 권합니다. 세상이, 사회의 구조가 어떤 이들에게는 불평등하게 되어 있는 곳들도 있고 이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매체와, 친구들, 분위기를 통해서 왜곡되거나 잘못된 정보를 접하게 되기 전에 부모가 적절하게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도록 권유합니다.


그래서 실행에 옮겨보았죠.

시위가 격화되어 주말에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던 날 오후. 아이에게 지금 왜 이런지 혹시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에게 따로 설명을 해준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이런 답을 합니다.

"조지 플로이드 아저씨가 죽어서 사람들이 화가 났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듣던 뉴스에서 그러던데?"

"그럼 그 아저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경찰이 죽였대."


물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 아이도, 열려있는 귀로 뉴스와 부모의 대화를 듣고 알고 있었던 거죠.


사회 학습이 일어나는
공간(가정/ 학교/ 기관)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삶을
접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도와줄 것.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거울처럼 학습하죠. 때문에,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라 이야기합니다. 미국 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아이들은 생후 6개월부터 인종의 차이를 인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 나이 4세부터 인종에 대한 편견을 표현하기 시작한다고 하네요. 그러니,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인종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도 사람이고, 여러 나라와 문화들이 해결하려 애쓰지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답을 모두 알고 있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삶'에 대해서 이해하고 인정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다양한 면면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노출될 수 있도록 애쓰는 것부터가 가장 중요한 시작인 거죠.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아이가 다니고 있는 미국 초등학교에서 진행되었던 행사를 잠시 살펴볼까요.

학교에서 진행된 International night에 참여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

[International Night]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각 각 가정에 있는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부스를 만들어 소개하고, 각 나라의 대표 음식을 먹어보거나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행사였습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구의 나라를 배우고, 친구의 엄마의 나라를 이야기했죠. 전통 춤을 배워보기도 하고, 파스타 만들기를 따라 해보기도 했습니다. 미니 여권 같은 공책을 부스마다 들고 다니며 체험하는 나라마다 도장을 받아가면서요!


뉴욕 퀸즈 공립 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던 [Tribe Culture Matching] 클래스도 동일한 목적으로 진행되던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미국 내에서도 부족 단위로만 남아 있는 소수의 민족들에 대한 문화와,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소개합니다. 아이들은 색칠을 하고, 퀴즈를 풀면서 만나본 적 없는 이들에 대한 친근감을 키워갑니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 어울려 놀기도 하고, 그 가정의 부모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변화했습니다. 때로는 한국에서는 이주 노동자로서만 만나던 나라의 사람들이, 한국만큼이나 매력적인 삶과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신문기사와 뉴스 속의 이야기들은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내 친구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으니까요. 서른도 훨씬 넘어서


다양한 문화를
아이의 환경 곳곳에 심어주세요

아이가 주로 소비하는 책, 영화, TV 쇼 등을 통해서 아이의 세계는 성장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바이러스로 활동의 반경이 집과 친밀한 지인들 정도로 한정된 경우에는 이런 매체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죠. 그래서, 바로 이런 툴들을 잘 활용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직업, 고정화되지 않은 성역할이나 장애인 등장인물 등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디즈니 주니어의 콘텐츠가 그것일 수도 있겠고,

글을 읽기 시작하는 연령의 아이라면 이런 인종과 다양성에 대한 동화책 또한 아이와의 소통을 시작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인종 관련 시위가 격화되면서 이렇게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서적들의 리스트가 학교를 통해서 공지되기도 했었죠.

(영미권의 부모님들이시라면 아래의 리스트 참고 부탁드립니다.)

찾아보니, 이런 책들 중에는 이미 각종 수상작에도 이름을 올려 번역되어 발간된 것들이 많더군요! 역시 없는 것이 없는 나라 한국입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스윽 우리 아이의 책장 위에 얹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출처: https://www.smlounge.co.kr/best/article/28449




얼마 전.

책장에 스을쩍 얹어둔 이 책을 아이가 읽어달라며 가져왔습니다.

인종 이야기를 해볼까? / 줄리어스 레스터, 사계절 출판사

"빈아. 백인이라는 단어 알아?"

"몰라."

"음.. 피부색이 우리보다 더 많이 하얀 사람들 있지? 예를 들면 비비안이나.. 셀린 같은? (TMI. 저희 아이의 반 친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부를 때 [백인]이라 한대. 그럼 [흑인]이라는 단어는 알까?"

"모르겠는데?"

"음... 테니스 선생님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을 [흑인]이라는 사람의 종류로 부른대."

"아! 피부가 초콜릿 색깔인 사람들?"

"응. 맞아. 그럼 우리는 뭘까?"

"음.. 우리는 피치(Peach-복숭아)사람들이야."


가장 근본적이고도 타고나 차이인 인종에 대해서, 사회가 편견과 선입견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은 꼭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 이면에는 보다 아주 근본적인 '나의 행복'을 위한 이야기적인 이유기도 하죠. 어쨌든 우리가, 나의 아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모두에게 조금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인 거니까요. 그리고, 타고나면서부터 정해지는 '인종'이라는 요소를 '나쁘거나 부정하는'방식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그 이후에 생겨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의 차이 역시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불편하지 않게 느끼고.

그저 그 차이를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키우는 것은.

한걸음 더 나가면, 타인과 다른 나의 삶있는 그대로 더 소중히 여기는 것과도 다르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동일 국가 내 & 동일 민족끼리도 지역으로/거주지로/직업으로/소득으로 나뉘고 나뉘어 증오와 분노감을 표출하는 상황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다.르.니.까.요.


이상.

뉴욕에서 복숭아 라이프를 살고 있는 맨모삼천지교였습니다.








참고 자료 및 기사 목록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756

http://www.edupo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8

http://www.sid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95 

https://news.joins.com/article/23204764

https://www.sedaily.com/NewsVIew/1VE0TP1VUW



매거진의 이전글 다양성의 나라, 미국의 (성)교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