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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Feb 12. 2024

타투, 기록



여과지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루가 흘러내리면 그 속 가득한 불안들이 내게 쌓여간다. 요즘과 같이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날이 반복되면 오물이라도 쏟아붓는 듯 불안의 무게는 몇 배로 늘어나고, 나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축 늘어지게 된다. 그 꼴이 똥 싼 바지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흉하고 망측하다.


흉과 망측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보고자 기록을 해나간다. 기록은 정화법이고 빛이다. 몇십 년을 살아오며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는 불안감, 깊고 깊던 네가 더 이상 옆에 없다는 상실감, 옆집 철수는 어느 대감집 일등 노비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엉덩이로 방바닥을 덥히는 일이나 하고 있다는 좌절감. 그 어두운 구석에 기록을 비추면 그늘의 농도가 옅어진다.


기록은 부담을 덜어내고 덜어내. 한껏 가벼워진 인간은 우주의 먼지가 된다. 너도 나도. 돌 정도나 되어야 채일 수도 있지, 먼지 따위가 어딜 감히. 우주의 크기를 보고 있노라면 신의 존재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먼지도 감지덕지. 사실은 우주의 먼지의 먼지.


명품 매장에 찔리는 마음 없이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거나 이름값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긴 글렀다. 하물며 하루에 한 번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인생조차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기록이라며, 먼지의 먼지가 그냥 먼지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기록이라며, 불안을 달랜다. 물론 이름값도 값이라 기록도 돈으로 번지르르한 것을 살 수 있으나, 몇 자가 남든, 몇 명이 읽든, 아무튼, 남는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냐 하고 마음을 쓸어내린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한다.


네가 열심히 좀 써보라며 탐탁지 않다는 듯 굴던 글쓰기 빈도를 크게 늘렸다. 네가 찍자 하면 마지못해 굳은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던 사진도 이젠 곧잘 찍는다. 동물에게 기록이란 본능인 걸까 하며.


자손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는 것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솔직한 이야기를 담는다고는 하지만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검열하며 써 내려가는 일기까지 모두가 기록이다.


부쩍 타투가 하고 싶어졌다. 제 몸에 그림을 그려 넣은 각자의 사정은 다르겠으나 내 것이 생긴다면 그 사정은 순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기록이 될 것이다. 순간을 감명으로 남길 수는 있으나 감명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고 마음은 물이다. 손가락을 펴고 물 위에 아무리 글자를 휘저어 내려가 봤자 결국은 물거품이다. 밤이 깊고 날이 새도록 아무리 물을 갈라봤자 멈추면 멈추는 일순간의 파동이다.


그렇기에 바늘과 잉크까지 사용해 가며 살을 찢고 진피에 색소를 깔아가며 기록을 새기는 게 아닐까 싶다. 너는 내 앞에 일렁이며 또 마음대로 판단하기 시작했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지만 네게 왜 타투를 했느냐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아 답변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남은 방법은 추측뿐이 없지 않나.


너의 타투가 가끔씩 내 팔에, 손에, 다리에 어른거린다. 그 쓰레기 같은 타투. 어찌나 쓰레기 같은지, 그것을 제 살에 박아 넣은 네가 얼마나 바보 같고 멍청이같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런 너와 헤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며 팔을, 손을, 다리를 문지른다.


기억이란 기록은 어찌나 하찮은지. 물그림자같이 멀건 것을 보며 너는 정말 바보 같은 애라고 염불을 외는 내 얼굴이 물 위 파동에 실려 흐릿하게 울렁거린다.


울렁임에 멀미가 나는지 보다 말고는, 사실은 나야말로 그렇지. 바보고 멍청이고. 일기 속 거짓말이 들킬까 제 발 저려 쏟아낸다. 그 바보 같은 타투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나도 이거랑 똑같은 타투 할까? 묻던 나야말로. 바보 같은 타투를 한 바보 같은 너의 바짓가랑이를 꽉 쥐고 온갖 마음을 질질 흘려대던 나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가 된다던 고전 영화 속 낯 뜨거운 대사를 떠올린다.


고전 영화 속 말의 무게는 인간의 의의를 꿰뚫는 철학서만큼이나 무거운 걸까...?


뭐라는 거야...


라는 답이나 돌아올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중얼거리며 얼굴이 벌게진 채로 정돈된 것들을 괜히 정돈한다.


물론 그 타투를 내 몸에 남기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하고픈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 타투를 새기지 않은 과거의 내게 너무 감사할 뿐이다. 안 그래도 기억이 무거운데 기록까지 해놨으면 허리가 굽고 또 굽어 다리 사이로 내 뒤 발자국만 바라보며 걸어 다녔을 것이다.


마치 파워레인저 타투를 같이 하자 약속 해놓고선 며칠 뒤 타투 할 돈으로 유럽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버렸다며 “그렇게 됐다!” 하던 친구들에게 감사하듯. 내 몸에 너도, 파워레인저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매일 아침 감사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의 끝이 인내심을 발휘하여 겨울을 넘겼다면 내 몸엔 네가 남았겠지. 백지를 후회로 그을리면 진짜 마음이 드러난다. 후회는 고통이고 고통을 견디며 진피까지 색소를 박아 넣으면 기록이 된다.


나는 땀을 닦는 너에게 함께 눈을 맞고 싶다 했으나 너는 추운 게 너무나 싫다 했다. 기왕이면 또 다른 더위를 함께 하고 싶다 말할걸. 추위도, 더위도, 낙엽을 밟는 냄새도, 새순이 머리에 흙을 이는 소리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함께.



가여운 백지가 펜촉에 찔리고 긁히면 색으로 물들듯 고통을 준 사람은 기록이 된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와 무릎께를 툭툭 털어내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간 사람도 없지 않은데. 인간의 삶은 필연 헛될 수밖에 없기에 어쩌면 너의 그 깊은 문신도 잘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나는 너의 기록이 되어 미완의 불안을, 부재의 슬픔을 덜어낸다.


나는 너의 기록이 된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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