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망가트린다

by 선희

길고도 긴 실패를 끝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왔다. 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사람이기를 꿈꾸는 것을 멈췄을 뿐이다. 성공하지 못했음을 받아들이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조금 더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오랜 기간 힘써 오던 일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바짓가랑이를 계속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치졸한 마음 때문이었다.


일이 사망 선고를 받기 전, 어쩌면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나는 여러 꿈을 꾸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다 말하고 연기자가 되고 싶다 말하고 영상을 전문적으로 다루어보고 싶다 말하고 개인 투자자로 성공하고 싶다 말하고. 그런데.... 내가 하고 싶다! 할 것이다! 라고 떠드는 것 말고는 한 게 없다는 사실을 이대로 덮어놓아도 되는 걸까.


일을 처음 시작했던 24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던, 그런데 사실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어리기만 하다. 사실은, 대단한 계획을 세웠다거나 구체적인 꿈을 그린 적도 없다. 사실은, 하고 싶다! 할 것이다! 라는 말을 그대로 행하는 게 무서웠다. 행동하는 순간 본인의 책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행동하는 순간 선택을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렇게 나는 나를 위태로운 안전에 가두었다.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중'이라는 허상으로 가득 채운 스케줄. 홀로그램으로 만들어낸 집. 기와집도 마천루도 궁궐도 만들어낼 수 있으나 살 수 없고 만질 수조차 없는, 길가에 놓인 벽돌 한 장 보다 집이라는 것과 거리가 더 먼. 그 모든 하고 싶었던 것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일, 24살부터 시작해 온 그 일의 연명치료가 끝나고 사망선고가 이루어졌다. 나이는 삼십 대가 되었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늦은 것처럼 느껴지는, 더 이상 새롭게 시작한 일로 성공이라는 궤도에 오르기는 어렵다고 느껴지는 나이. 그 생각이 나를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정말 마지막 기회야. 그동안 발 한 번 담가본 다른 일도 없으면서 평생 사랑할 일을 찾으려 들고 평생 돈벌이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려 든다. 설익은 조바심이 난다. 아늑했던 여행지 호텔 방의 전화가 울리고, 친절하지만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제는 나갈 시간이라며 보채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그러니까 내 인생은, 누군가로부터 잠시 빌린 호텔 방이 아닌 내 집이지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꾼 인생을 살아가듯 구는 걸까. 내게 당장 나가라 소리치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대체 누구에 비해 늦었고 누구와의 약속에 늦었단 말인가. 또 시간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제가 있었듯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듯 내일도 있는 거 아닌가.


팬텀스레드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레이놀드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을 하며 같은 어제와 같은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낸다. 그 같은 일정을 흐트러트리는 누군가가 인생에 끼어들면 그는 몸에 가시가 박힌 듯 끔찍한 심정으로 재깍 그 가시를 뽑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러던 그에게 그녀, 알마가 박힌다. 알마는 레이놀드의 인생을 망가트린다. 그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가라앉고 있던 레이놀드의 인생은 알마의 개입으로 빠르게 망가트려진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알마가 구제한다. 다름 아닌 망가트림으로써.


정확히 말하자면 알마가 망가트리고 망가트린 레이놀드의 무언가는 그의 인생이 아닌 그가 걷던 길과 그를 지켜주던 테두리였다.


인생은 숨이고 바다고 햇살이고 달빛이며 흙이요 감정이요 경험이며 생각이고 지구고 우주다. 정할 수 없고 어디로든 흘러가고 썩지 않으며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순서가 없으며 고이고 담기지만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아니 나는 나를 망가트려야 한다. 나는 우리의 행동이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나를 망가트려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나는 나를 망가트린다. 나는 나를 망가트릴 수 없다. 나는 세상을 망가트린다. 나는 그 무엇도 망가트릴 수 없다. 매일은 나를 망가트린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나를 망가트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나를 망가트려도 괜찮다. 망가트려진 나는 흩어지고 모이고 담겼다가 흘렀다가 퍼지고 오래되고 새롭고 뭉친다. 그렇게 망가지고 나면, 다시. 그뿐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저 존재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고,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는다. 누구나 아는 그것이 너무나 어려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고 소리를 지르고 몸을 떨지만.... 한 두어 장 썼으려나.... 백지로 가득 찬 노트를 펴고 속지가 찢어져라 눌러쓴다. 그래? 그럼 그냥 다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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