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위로 마음이 포개진다. 나는 무슨 마음을 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걸까.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는다는 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 누구에게 어떻게 마음을 내어줄지, 나의 빈 한편에 꽂아둘 책처럼 어떻게 소중히 잘 꽂아놔야 할지 생각해 본다. 그것을 누군가는 우정으로, 누군가는 애정으로, 누군가는 인연으로, 또 누군가는 사랑으로 부른다고 했다. 나는 우정. 애정. 인연. 사랑 등의 단어들을 떠올리며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줄 우정이라는 게 남아있었던가. 어쩌면 소멸한 애정의 씨앗이 어느 순간 불현듯 틔워낸 건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였던가 바라지 않는 애정을 주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기대하지 않으니 마음이 후련했고, 내가 준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 꽤 스스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것도 같았다. 그렇게 점점, 한 살 두 살씩 나이를 먹어가며 내가 주는 사랑의 크기를 재고 따지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좋아하는 언니가 보내준 책 잘 받았다며, 읽어보니 너무 좋다며 전화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심 뿌듯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선물을 하는 건 약간 겁이 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일단 좋아해야 하고, 취향이 비슷해야 하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상대방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어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받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 책은 너무 까다롭고 예민해서 신중히 골라 선물해야 한다. 책이 독자를 거부하는 일도 꽤 많이 일어나는 일이니 말이다(나도 그런 책들을 종종 읽다가 그만두곤 했다) 잘 받았다는 말보다, 읽어보니 너무 좋다는 말이 왜 이리 좋던지. 내가 그 책을 보내며 쏟은 애정이 언니한테 잘 곧이 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곧은 마음이 곧게 가면 그만큼 즐거운 일도 없는 것 같다. 내 마음이 애정이, 사랑 어린 우정이 잘 전달된 것 같다. 분명히 좋아해 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만큼은 좋아해 줄 거란 확신. 타인의 취향에 명중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우리는 그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며, 시인들이 쓴 책은 너무 좋다고 이야기한다. 시인들이 쓴 산문집은 어딘가 모르게 묘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는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문장의 구성이 기승전결로 굳이 끝나지 않아도 시인이 쓰는 문장 자체는 다시 시가 되는 것만 같다.
시인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걸까.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언니와의 통화에 마음이 수채화 물감으로 덧칠해지는 느낌이다. 연두였던 색은 더 푸릇한 연두색으로, 레몬색이었던 노랑은 조금 더 개나리 같은 샛노란색으로 마음이 진해진다. 그 이유만으로도 선물을 준 마음이 충분히 차오른다.
비가 온다.
남겨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비가 오고, 물 웅덩이가 생기고, 전화너머 우정이 남겨지고, 책을 읽고 감성이 남겨진다. 그리고 하늘이 회색빛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내가 남겨진다. 그 어떤 형태로든 남겨지는 내가 좋다. 오늘만큼은 엄마인 나도 좋고, 어느 한 여성인 나도 좋고, 어떤 걸로 정의가 되든 좋다.
쓸쓸하게 내리는 비를 이슬처럼 바라보듯이 감상에 젖어본다. 우울하지 않은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