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신랑을 만났을 때.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처음으로 타지로 이사 갔을 때. 처음으로 산후 우울증을 깨달았을 때. 처음으로 아이에게 큰소리쳤을 때. 처음으로 남편과 싸웠을 때. 처음으로 애엄마들과 만났을 때...
주로 다들 처음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을 상기시키려면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내가 느낀 '처음'들이 어디론가로 흩어졌겠지. 희미해진 처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 인간은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 처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뭔가 버벅거리는 신입사원의 마음이랄까.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게 맞나 싶은. 이제 막 회사에 취직한 나이 든 신입사원에 모습 말이다.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 남편의 중간중간 유머 있던 모습들. 망설이던 얼굴. 첫 아이를 가지고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전화했던 휴대폰 속 내 목소리. 체리색 몰딩이 여기저기 가득했던 첫 신혼집. 첫아이를 낳고 이유 없이 터지던 눈물들. 내 맘 같지 않아 큰아이를 재촉하던 내 짜증. 연락을 왜 안 받느냐며 핸드폰을 집어던질 것 같은 나를 뜯어말리던 남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콩닥콩닥한 마음으로 만났던 조리원과 맘 카페 동기 언니들. 항상 막내였던 나. 그 모든 게 선명하진 않지만 파스텔처럼 쓱쓱 문지르면 번질 것 같이 그려진다. 그래. 그 모든 상황 속에는 늘 항상 내가 있었다.
처음이란 단어는 뭔가 늘 설렘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나는 좀 서툴렀으며 어색했고 민망해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처음이라는 말에 따라오는 감정이 늘 설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엔 기분 주머니가 많이 들어있는 보자기 같았다. 풀면 풀수록 기분 주머니들은 제멋대로 흩뜨러 졌다. 어떤 때는 화남으로, 어떤 때는 막막함으로, 어떤 때는 답답함으로. 주로 좋았던 기분보단 어려웠던 기분들이었다. 내가 처음 감당하는듯한. 그런 기분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어렸고 어린 만큼 조급했으며 모든 일이 내 마음과 같지 않으면 심사가 뒤틀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생각이 그 정도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이십 대 후반의 나와 삼 심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내가 어떻게 똑같은 생각으로 모든 일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같은 선상에서 묶어서 이제는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긴 온다. 평생 안 바뀔 줄 알았는데, 조금씩 꼰대처럼 바뀌어가는 나를 보며 나도 나이가 들긴 드는구나 싶다.
뭐든지 처음이 쉽지 않은 법이지만.
처음에 가졌던 그 감정들은 또다시 느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건 처음이라서 가지는 감정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 감정들이 무색하리 만치 무채색으로 변해간다. 분명히 각각의 색깔이 분명했는데,
꼭 흑백 화면처럼 지나가는 느낌이다. 나는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하지만, 바래진 기억은 생각보다 더 색이 옅어진다. 그날의 감정. 기분. 날씨. 목소리의 높낮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을까.
흑백 사진을 보듯이 매만지며 이땐 이런 일이 있었지.라는 정도로 기억해낸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지나왔고 또 지나가고 있다.
짧게나마 메모를 해두면 상기시킬 수 있다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게 상기가 될까. 그 온도와 감정들. 찰나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과연 짧은 메모로 상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나는 짤막한 메모 가지고는 도통 그 모든 것들을 잡아낼 순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엔 내 머리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안다.
처음 빈 화면에 자음과 모음을 써 내려갈 때 매일 느낌이 다르다. 그건,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때그때 다른 마음을 나는 곧잘 잊어버려서 현재를 쓴다.
내일이 되면 이 마음은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르고, 흐려질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은 오늘은 살아가는 거니까.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해 지금의 순간을 붙잡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 말하고 싶은 언어들. 떠오르는 문장들. 노트북 옆 사물들의 위치. 아들들의 분위기. 나의 또 다른 생각들.
등등... 뭐 그런 거 말이다.
또 내일이 되면 오늘을 생각하며 사진을 구경하듯 구석구석 구경한다 해도, 내일의 공기와 오늘의 공기는 다르리라. 마치 이미 그린 그림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