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로 결심하다
2020년 5월, 새벽 2시.
이불을 차고 일어나 남편 방으로 가 노크를 했다. 조심히 문을 열고 그가 아직 안 자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들어가도 돼? 우리 얘기 좀 해" 별안간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남편의 얼굴에 더욱 긴장감이 돌았지만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 제주도로 내려갈 거야. 그런데 이혼하고 정리하고 갔으면 해."
그날 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의 미래에 상대방과 함께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정리하기로 했다. 이틀 후 제주도로 내려가 애플망고 농원에 면접을 보고 인터넷에서 보았던 집을 계약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짐을 정리해서 부쳤고 잠시 친정집에 가 있었다. 그사이 남편에게서 법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우린 서울 북부지방법원에서 만나 이혼 서류를 작성했다. 감정이 없는 듯 우린 너무나도 태연하게 절차를 밟았고 고맙게도 남편은 정류장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는 날, 집 앞에 내려와 아들을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 순간엔 남편도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뒤돌아 캐리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엉엉 울었다. 성북동 한성대 앞 지하철역에서 김포공항으로 떠나는 길에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무섭고 두렵고, 긴장되었다. 나 혼자다 이제. 도와줄 사람도, 기댈 곳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혹여라도 후회하면 어쩌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래도 받아주겠지...
서귀포시 안덕면.
시골이라 그런지 버스도 이상하고 길도 왜 이리 오르막인지. 너무 힘이 들어 주춤하면 캐리어가 주욱 미끄러져 내려온다. 두 손으로 캐리어를 밀어 한참을 걸었더니 하얀 건물이 보인다. 낯설지만 내 집이 될 곳이다. 문 앞에 미리 부친 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안에 들이고 방 안에 들어갔다. 침대, 책상, 옷장 하나. 짐을 다 풀고 정리했지만 계속 썰렁한 분위기가 돈다. 얼마나 오래 사람이 안 들었는지 냉기가 돈다. 낯선 공간에 누가 잤는지 모를 침대에 누워 첫날밤을 지새우며 온갖 생각에 꼬리를 물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찍 집을 나섰다. 8시까지 도착하려면 한 시간 전에는 나가야 제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배차간격이 멀어 한 번 놓치면 25분을 더 기다려야 했기에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일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일하려면 배울 것이 많았다. 망고를 정리하고 포장하는 법, 음료를 만들고 손님을 응대하는 방법, 농가 사장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배우고 익히며 하루 9시간을 일주일에 하루를 쉬어가며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잠에 일찍 들었고 다음 날이면 또다시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일터로 나가서 바쁜 일상을 보냈다. 잠들기 전 아들과 통화를 하고 끊고 나면 베개를 끌어안고 크게 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루틴이 익숙해졌고 일에 나의 책임감이 커지면서 점점 이곳에서 생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게 기댈 곳은 이곳 사장님과 이사님이었고 기대할 꿈도 이곳이 전부였다. 애플망고 사업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었다. 3주 만에 나는 과장이 되었고 애플망고 농원에서 테마농장을 이루고자 하는 사장님에게 나는 믿을 만한 조력자로서의 입지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 실장님의 부적절한 처사로 사건이 터졌고, 그분의 나에 대한 성적 의도가 분명히 밝혀짐으로써 나는 한 달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육지에서 이 척박한 섬에 홀로 내려와 굳은 의지를 갖추고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딸 같은 저 아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아느냐며 나무라는 사장님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감싸주는 사장님과 이사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았지만, 그곳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그때엔 결코 내가 이혼한 사실을 알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제주도에 연고도 없는 여자가 내려와 혼자 산다는 건 누가 봐도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이고 그 사연은 대부분 이혼이라는 것, 그런 여자를 누구나 쉽게 본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받아들이고 버텨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결혼생활 애초부터였지만 여태껏 미뤄온 이유는 어머니의 건강과 아이 때문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경제적인 독립이 두려웠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하기도 전에 결혼했고 아이가 먼저 생겼기에 육아와 집안일이 나의 직업이 된 지 10년이었다 그동안 나의 꿈은 뒤로 접었고 이전의 자유롭고 당당했던 나의 성격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학 동기들과는 일찍이 멀어졌고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는 잘 지냈지만, 여전히 온전한 나의 모습을 내비치며 살기가 어려웠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살아가기 위해 나를 바꾸어야 했고 그래야 생활이 되었으며 나의 욕심을 차리려고 하면 항상 무언가 빗나갔다. 그래서 오랜 시간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왔고, 남편과는 일찍부터 대화가 끊긴 채로 각자의 삶을 한 공간에서 지내는 룸메이트와 같은 사이로 지내왔다. 누군들 남편에게 불만이 없겠느냐마는 그래도 함께 사는 건 정이 들어서고 아이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인정하기 싫었다. 아이가 나의 손을 타지 않아도 될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고 계속해서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막막했고 네트워크도 끊긴 지 오래고 나의 손도 놓은 지 오래였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도 아이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추려면 적당한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핑계면 핑계겠지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도 사실 나는 그의 울타리 안에서 그동안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안에서 한 번도 날아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우울하게 산다는 건 정말이지 나를 스스로 망가트리는 일이기에 한 번은 크게 마음을 먹고 박차고 나가야 했다. 모든 게 겁이 나고 두렵지만, 그 한 번을 깨면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고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나를 두기 위해 멀리, 이곳, 제주로 왔다. 가혹하지만 아무도 기댈 수 없는 곳에서 나를 단련시켜야 더 낯선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이곳을 시작으로 나는 유목 생활-노매드 라이프를 실현하고자 한다. 스스로 준비가 되고 적당한 때가 되면 어디든 가서 자유롭게 일하며 살 수 있는 날을 꿈 꾸며 오늘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또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