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기 중에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나도 재수해서 들어왔는데 그 언니는 3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 후 일을 하다가 대학에 진학한 것이었다.
우리는 꽤 친해졌고, 각자의 백그라운드는 모르지만 과 내에서 만큼은 늘 동등한 입장이었다. 대학 내내 그 언니는 부모님이 전세로 마련해 준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월세 걱정 없이 지냈다. 물론 일 할 필요도 없었다. 반면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다녔던 미술학원에 보조강사로 채용 돼, 3학년 말까지 강사로 일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난 휴학을 결심했다. 다른 동기 하나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겨 여름방학 미술학원 특강으로 벌인 450만 원으로 나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덕분에 나의 동기들과 함께 졸업작품 쇼를 진행하지 못했고 일 년 뒤에나 졸업했다. 내가 졸작을 시작하는 동안 그 언니는 개인 부티크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졸업 후 아이가 생겨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 즈음, 그 언니는 본인의 브랜드 사업을 만들었다.
이후 우리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난 가끔 몇 개월 안 된 내 아이를 안고 언니의 사무실에 찾아가 서로 사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찾아가는 횟수가 줄었고 연락도 뜸해지면서 우리는 멀어졌다.
결혼생활이 시작되면서 나의 민낯은 다 드러났고,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의 백그라운드가 나를 단정 짓는 한계치였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난 큰 일을 할 만한 그릇이 안 되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런 부모님 밑에서 항상 넌 안될 거라는 비난을 받았고 시집가서는 다 너의 선택이었으니 남 탓 할 것 없다는 참으로 유교적으로 겸손하기 짝이 없는 ‘분수를 알며 살라’는 그 말이 여태 내 인생을 지배했다.
난 내가 외국을 나가고 싶은 마음, 무언가 속고 사는 기분, 저 부모는 내 친부모일리가 없다는 의심, 난 더 잘 난 사람인 거 같은데 결국 여기까지밖에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게 내 ‘한계치’였음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니 욕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애통해하느니 속세를 멀리하여 절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다 나의 한계를 깨부순 것이 이혼이었다. 나의 인생을 어쩌면 한 번에 급상 시킬 수 있는 방법, 결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 주제에 너무 클라쓰 차이가 나는 남자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나마 만난 그 집에서도 날, 우리 집안을 늘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 난 불만이 쌓였고 계속해서 회피할 것을 찾았다.
짤막하지만 영향력이 컸던 해외여행은 나를 울타리를 넘게 한 첫 번째 발견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다시 일상으로 되풀이되는 불만족스러운 거지 같은 쳇바퀴는 어김없이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혼 후 제주도에 혼자 살면서 극강의 외로움을 버티며 만들어 낸 새로운 내 인생관은 ‘무소유’였다. 물질적인 의미뿐 아니라 꿈도 점점 줄여나갔다. 그래 큰 꿈을 꾸지 않으면 괴로움도 덜 하겠지, 돈은 딱 내가 필요한 60만 원만 벌었고, 걸어 다니는 것에 건강해진다 스스로를 위안했고, 물건이 없으니 정신도 맑아진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딱 한 가지가 늘 아쉬웠고 나중엔 그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사람’.
내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점점 외로워지고 고독해지면서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았다. 왜 내 옆에 지금 아무도 없는 거지?
왜 내방은 이렇게 허하지? 왜 내 물건들은 다 중고지? 왜 사람들은 날 귀하게 대하지 않지? 왜 난 이렇게 가난하고 볼품없이 생겼고 다 모자란 걸까. 이혼을 했고 당당하게 내 삶을 살고 있는데도 왜 난 멋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유는 명확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도 그런 삶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여행 이후,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잘못 세워지면서 물건을 사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소비를 조장하는 물건을 만드는 일(창작자)의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느니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며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을 읽고 나서는 불편하게 사는 게 인생의 참맛이라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편리를 이용하는 것보다 몸을 쓰더라도 불편을 감수했다.
그랬더니 내 삶이 초라해졌다. 꼬락서니도 그렇지만 마음적으로 매우 피폐해졌다. 그리고 종교에 빠지기 시작했다. 난 너무도 빨리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그를 믿기 시작했고 내가 그의 선택받은 딸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역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시는구나. 이상하게 그즈음 이 세상에는 어떤 원리가 있을 거라는 의구심이 들었고 그 위대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는 거라 강력하게 믿었다.
그동안 덜어내며 사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던 내 삶에 ‘풍요’를 기대하며 살라는 말, ‘다 누리고 살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한참 지난 후애 어떤 희망이 생기는 걸 느꼈다.
풍요로움을 바라는 게 욕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삶이란 또 어떤 형태의 ‘사람 살이’라 나는, 그 사람의 관계에 부딪혀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난 어떠한 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이든 어떤 신이든, 무언가 확실히 있다는 사실. 그걸 존재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아직 그렇게 생각이 든 적이 없으니 말이다.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는 말에 아주 사소한 일이라지만 최면처럼 바랬던 것들이 눈앞에 보였고 나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도 이상했다.
매일같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하루에도 원룸 한 구석에 깔아놓은 담요에 무릎을 꿇고 수없이 기도했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것들에 대한 해답을 달라고. 운 적도 많았고 포효한 적도 많았다. 초반에는 나의 기도가 잘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때 미치도록 결정이 어려워 구걸하듯 했던 내 기도에 하나님은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더 기다렸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난 바로 깨달았다.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건 이런 ‘영’ 이 아니다. 난 지금 내가 직접 닿을 수 있는 정말 살이 붙은 사람이 필요했다.
어느 날 그 동기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몇 년 전에 그 언니는 결혼을 했고 이번에 휴가 차 전국에 캠핑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장소로 제주도를 정했고 이참에 나를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난 너무도 반가웠다. 꼭 그 언니라서가 아니라 제주도에 내 아는 지인이 나를 보러 오겠다는 것 자체가 너무 반갑고 행복했다. 며칠 후 언니가 왔고 우리는 거하게 취하도록 마시고 이야기했다.
언니를 재우려 방에 같이 들어가 언니에게 편한 옷을 골라 꺼내려는데 날 지켜보던 언니가 갑자기 물었다. “야 너 지금 나한테 일부러 잘해주려고 하는 거지? 너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드는데 잘해주는 척하는 거지?”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를 그 언니의 발동에 난 제대로 말려 말싸움을 했다. 언니가 나가자 그 남편이 들어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분하다는 듯 울며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오빠 근데 어차피 언니 남편이잖아요. 내 말 들어봤자 결국 언니 편이잖아요.”
침대에 엎드려 베게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부짖었다. 그리고 뚝 그쳤다.
괜찮아 난 원래 혼자니까. 이런거에 이제 익숙해 져야지..
다음 날 아침, 그 언니에게 잘 돌아가라는 메시지도 보냈고 전화도 했지만 받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누군가에게 얘기했더니 그 사람이 그랬다. 딱 한 단어가 떠오른다고, 자격지심. 그 언니가 사회적으로든 어떻게든 너보다 성공했던간에 나에게 열등감이 있는것 같다라고. 이 말이 한동안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며칠 전 난 우연히 그 언니가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알았다. 난 그 언니를 질투하는가보다. 그리고 그동안 내 삶에 풀리지 않던 이유룰 하나씩 발견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컸던 것 하나. 난 거창하게 꿈 꾸는것 마저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다. 분수에 맞지 않다라고 생각해서. 40년을 그렇게 살았고 남은 건 정말 딱 그정도다.
앞으로 적어도 더 살 40년은 이루며 사는 맛을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