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입춘이다.
오지 말라고 말려도 기어이 오고야 말겠지만
코로나 19에 시달려온 지난 1년은
상징과도 같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입춘을 더 고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올 입춘은 많은 사람들의 오랜 손사래에 시달리며
오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와 준 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입춘 아침, 고추 세 포기 중 두 포기의 고춧잎을 모조리 따냈다.
잎에 응에가 끼어 있는 걸 겨우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이 방심한 사이
응에는 볕 좋은 자리에 자리한 고춧잎에 광고도 없이 전원주택 단지를 형성했다.
푸른 잎들에 점점이 앉아 응에들만의 볕 좋은 날을 만끽하고 있었다.
잎을 쳐 내니 주렁주렁한 열매들이 푸르다.
추운 날에도 꽃봉오리를 올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의 모습을 갖추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열매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팥알이나 서리태 정도 크기까지 자라다 누렇게 변했다.
더는 성장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는지 누렇게 변하는 동안 제풀에 떨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누래진 그 모습으로 오래 버티고 있기도 했다.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모습이나 고추가 한겨울을 견디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래 버티고 있는 작은 열매들을 떼어냈다.
어떤 열매는 그렇게라도 살아보겠노라 버티기도 했다.
손에 힘을 주어 떼어냈다.
살아있는 무언가를 힘주어 억지로 떼어내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작은 열매 하나는 몇 개월째 붉게 익은 상태고
늦어도 12월 말에 맺힌 열매들은 크기는 그대로인 채
붉은 기를 조금씩 머금어 검푸른 기색이 역력하다.
봄이 되면
위쪽 가지들을 모조리 잘라내고
원줄기 하단에서 삐죽거리는 새 순을 받아 키워볼까 생각 중이다.
한 포기는 응에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벌레들에 강한 구아버 화분 곁에 둔 덕분인가 싶기도 하다.
모든 꽃들이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피었던 꽃들이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보란 듯이 모두 열매를 맺었다.
아마 12월 초였을 것이다.
나도 생각을 바꿨다.
모든 꽃들은 열매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태어나지만
그 가능성을 제로화시키는 건 환경이라고 강변하는 저 꽃들의 결과물, 열매들의 목소리를
경험을 통해 마음에 담는다.
다시 만난 입춘을 축하하듯 세 번째 구아버 꽃이 피었다.
코를 구아버 꽃에 묻고 세 번째 구아버 꽃 향기를 맡았다.
새로 돋은 구아버 가지 끝에선 잎겨드랑이마다 새 눈을 머금었다.
잎눈일지 꽃눈일지 헤아리지 않기로 한다.
잎눈이면 잎을, 꽃눈이면 꽃을 즐기면 된다.
무위도식하면서도 세월만 보내면 입춘 맞이를 할 수 있다니.
입춘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
대문 밖에 붙이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먹을 갈고 붓을 준비해 드리곤 했었다.
경건하지 않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