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최근에 담낭절제수술을 받게 되었다. 평소 지병인 간경화를 앓고 있던 아빠는 20년째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을 다니고 있었고, 주치의로부터 간 기능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담낭절제술 중 지혈이 어려워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를 듣게 되었다. 본래 담낭절제수술이라는 것이 복강경으로 30분~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기는 하나, 주치의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엄마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병원에 가기보다 아빠 상태를 잘 아는 이 병원에서 담낭절제술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정 그렇다면 우선 2차 병원에서 들러 소견서를 받아서 다시 대학병원으로 제출하는 과정을 거치는 요식행위와도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전공의 파업 문제도 있고 해서 대학병원에서의 수술은 무한 대기의 리스크가 있었지만, 작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가 만에 하나 의료사고라도 일어나게 되면 그 뒷감당을 할 용기가 없었기에, 급하게 동네 2차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2차 병원의 의사에게 '우리는 당신네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병원에서의 수술을 위해 절차상 소견서가 필요할 뿐'이라는 이 노골적이고 껄끄러운 요구를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빠는 의사 면전에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몹시 불편해했고, 결국 엄마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에게 아빠의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의사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우리가 원했던 대로 소견서를 써주었다. 그리고 소견서를 받아 병원을 떠나는 우리 가족에게 건승을 빌어주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 우리 가족은 우리의 마음을 찜찜하게 했던 이 '불편함'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사람에게 해선 안될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2차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소견서를 써준 의사도 같은 면허를 가진 사람인데, 우리처럼 이렇게 자기네 병원이 아니라 메이저급의 큰 병원에서 수술받겠다고 와서는 소견서만 달랑 받아가려는 환자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본인도 충분히 수술할 자격이 있고, 능력도 있는데 우리가 단지 규모가 작은 2차 병원의 의사라는 이유로 본인을 무시하며 불신했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그 의사는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텐데도 우리한테 끝까지 신사적으로 대해준 것을 보면 정말 인격적인 의사로군. 그리고 빌었다. 어쩌면 이기적 이어 보일 수도 있는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제발 그 의사의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기를.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규모가 큰 것만을 가치롭게 여기고 추구하는 자본주의적인 질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그에 부역하는 것 같은 배덕감과 죄책감이었다. 200년 전에 어떤 독일 사람도 우리와 동일한 이런 감정을 느꼈다.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이러한 감정을 소외(alienation)라 칭했다. 어쩌면 마르크스도 아빠와 내가 그랬듯 무언가가 작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평가절하되는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규모가 작거나 크거나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도록, 규모만이 가치를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왜곡된 체제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그의 이데올로기가 실패했던 이유는, 사람은 결국 죽을 때까지 큰 것을 욕망함으로써 작은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동물이었고, 그 욕망이 불러오는 인간의 선택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본주의 체제에 완전히 순응함으로써 이러한 배덕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모두가 하나같이 사회적 엘리트가 되기를 원하고, 모두가 계층 사다리에서의 상향이동만을 추구하고, 그 경쟁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내 아이에게 기꺼이 물려주고 싶을 만큼 '좋은' 사회일까. 사람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에 이데올로기가 처참히 실패했다면, 아직도 사회 저변에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종교의 힘은 어떠한가. 사회적으로 약한 자, 소외된 자, 주변부에 놓인 존재에 대한 예수의 관심,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잔혹한 세상을 비관하여 벌어지는 자살률과 저출생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사회에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한 종교 윤리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를 무턱대고 비판하기 이전에, 종교인들은 각자의 시대에 성경적인 사회상을 제시함에 있어 마르크스보다 얼마다 더 나았는지, 마르크스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자성해야 한다. 종교인이라면, 사회적 소외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배덕감에 이토록 무뎌진 채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그만 직면해야 한다. 예수가 이 땅에서 한 번도 엘리트로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