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박정민 청룡열차“에 대한 단상

by YUJU

일전에 예매해 두었던 경복궁 내의 한 역사 체험 프로그램 날짜가 임박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시에 뜻하지 않게 속 시끄러운 일도 있었고 해서 그냥 취소를 할까 했는데, 아뿔싸 취소 기한이 이미 지나버렸다. 에라 이렇게 된 거, 그냥 한번 다녀와보자! 하는 마음으로 경복궁으로 터덜터덜 길을 떠났다.

창덕궁 궁궐 안내 자원봉사를 그만둔 후 궁궐을 자주 찾지는 못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 궁은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 이제는 외국인들이 관람객의 8-90%에 육박하는 경복궁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전문 사진사들을 보면서, 다른 나라 관광지에 온듯한 기분을 잠시 느꼈다.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단청 구경, 가을 하늘 구경을 하다가 마침내 시간이 되어 생과방 행사가 열리는 소주방에 입장하였다.

일반인으로서는 궁궐 전각의 내부에 들어가 볼 기회가 거의 없기에, 전각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이 소원인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궁궐로 소풍을 오면 작은 틈이라도 발견해 실내를 어떻게든 들여다만이라도 보려고 애를 썼는데, 성인이 되고부터는 학문적으로나, 자원봉사 활동으로나, 이런 체험으로나 비공개 되어있는 전각 내부에 들어가 볼 기회가 몇 번이고 생겨나고 있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나는 대단히 '성공한 덕후'라는 생각이 든다.


생과방 나인이 차를 가져와 상에 올려주고, 덮여있던 찬합의 뚜껑을 열면 이렇게 예쁜 다과들이 나온다. 사실 큰 기대를 하고 가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하나하나 깔끔했고 돌아와서도 그 맛이 전부 기억날 정도로 맛있었다.

선천적인 '자발적 아싸력'의 소유자답게, 4명이 앉는 방에 손님은 체험이 끝나가는 내내 나 하나뿐이었다. 예매가 정말 힘든 체험이라 나 또한 취소표를 겨우 잡은 것이건만, 그 박 터지는 예매 전쟁을 치르고도 기회를 날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선물로 주어진 이 적막함을 만끽할 수 있어 내심 기뻤다.

소식좌지만 그릇을 바닥까지 싹싹 비워냈다. 다과 밑에는 이렇게 내가 먹은 음식들의 이름이 정갈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열일하시는 나인분을 뵈니 옛날 창덕궁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창덕궁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걸 알게 되신 한 교수님은 한동안 나를 보면 '창덕궁 무수리'라고 놀리셨었다. 무수리여도 좋으니, 궁궐 좀 자주 가고 싶다는.

체험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한 점 주름도 없이 청아하게 펼쳐진 가을 하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온갖 잡생각들이 마치 빨래로 빤 듯 깨끗하게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생과방 바로 앞에는 자경전이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즉위를 도운 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고종이 특별히 지어준 전각이라 한다. 양어머니 보시라고 꽃담을 만들어 이렇게 예쁜 꽃도 새겨 넣었다. 이 작은 꽃이 처음 담에 새겨진 이후로, 담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꽃은 100여 년도 훨씬 더 이전부터 줄곧 이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최근 밈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 되어버린 '박정민' 사태(!)를 분석하고 싶어졌다. 나 또한 한번 타면 내릴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청룡’ 열차에 올라타버리고 만 여느 필부(匹婦)들과 다를 바 없이,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대로 1일 1박정민을 하던 중,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라는, 역사가 주는 치명적인 매력이 나에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무수한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동안, 오욕칠정에 사로잡힌 채 평생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지랄 염병'과도 같은 몸부림을 치다가 한 줌의 흙이 되어 사라지는 동안,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작태를 너그럽게 포용한 채, 인간을 그저 지켜보는 역할을 아주 오랜시간 해왔다.


자유로운 화사의 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처럼 담담하게 바라보는 박정민의 자상하면서도 무던한 눈빛이 여러 여심을 홀렸듯, 역사가 보내는 그 잔잔한 시선이 나에게 주는 묘한 위안이 있다. 너도 그저 유한한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은 사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일 뿐이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고개를 들어 처마에 그려진 단청을 올려다 보았던 사람이, 돌담에 새겨진 꽃장식을 유심히 보았던 사람이, 비단 너 하나만이 아니었듯이.


이 잔인하고 비극적인 인생을 하루라도 더 버티고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자기 객관화와 메타인지.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역사의 쓸모'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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