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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그레이드-옆으로 걷는 삶도 괜찮아

"옆으로만 걷는 우리들의 이야기"

by 임선재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 저녁,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요즘 직장에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던 친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에 옮기면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결국 같은 처지의 회사로 옮기는 것 같아.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옆그레이드 같아."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옆그레이드라니, 요즘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스마트폰을 살 때를 떠올려보자.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더 좋은 성능과 기능을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손에 쥐고 나면 달라진 건 미세한 차이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새 모델을 사고 싶어 한다. 친구의 고민도 다르지 않다. 더 나은 연봉, 더 좋은 환경을 바라며 이직을 결심하지만, 결국 조금 다른 조건의 회사로 옮기는 게 전부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마치 옆으로 움직이는 무한 반복의 과정 같다.


옆으로 걷는 삶의 발견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간은 자신이 속한 구조와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단순히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위로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때로는 옆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얻고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친구에게도 말했다. "옆으로 간다고 꼭 나쁜 건 아니야. 새로운 동료, 새로운 업무를 하면서 얻는 게 분명 있을 거야."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사실 나도 안다. 이런 말이 현실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한다는 걸. 하지만 옆그레이드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기도 하다. 위로 오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옆으로 움직이며 버티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성공의 기준은 지나치게 수직적이다. 좋은 대학, 높은 연봉, 더 나은 직위. 하지만 이런 수직적 성공을 모두가 추구할 수는 없다. 삶에는 다양한 경로가 존재하며, 그중 옆으로 걷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쌓는 일은 삶에 깊이를 더해준다.


옆그레이드와 성장의 관점

옆으로 걷는 삶은 때로는 멈춘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이동하는 한, 그 속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모든 위대한 것은 느리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옆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들여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은 빠른 성공이 줄 수 없는 깊이를 선사한다. 더 나은 직장을 찾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업무 방식을 배우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스스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다. 수직적 이동이 아닌 옆그레이드는 때로 더 풍요로운 내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옆그레이드의 철학적 의미

옆으로 움직이는 과정은 단순히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행위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을 통해,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와 적응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옆으로의 움직임은 이런 창조적 진화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연봉, 더 높은 직위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변화다.


옆으로 걷는 삶의 실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옆그레이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먼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 현재의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깨닫고, 그 경험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옆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관점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서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또한, 자신만의 속도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는 없다. 옆그레이드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느리더라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옆그레이드와 삶의 다양성

우리 삶에서 옆으로 걷는 순간들은 때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던 사람이 갑작스레 방향을 바꿔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과학자가 글쓰기에 도전하거나, 엔지니어가 예술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옆그레이드적 선택은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현대사회는 효율성과 속도를 강조하지만, 다양한 경험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옆으로의 움직임이 단순히 좌절이나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소 평탄해 보이는 길일지라도, 그 길에서 무엇을 배우고 발견할지는 오직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다.


옆으로의 움직임이 주는 선물

결국 중요한 건 방향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옆으로 움직이는 그 과정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나아간다. 비록 느리더라도, 그 움직임이 쌓여 언젠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거라 믿는다.


오늘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도 내 자리에서 한 걸음 옮겨 본다. 옆그레이드는 단순한 대안적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창의적 과정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성공의 정의가 아닐까? 지금의 자리에서 한 번 더 숨을 고르며, 나만의 옆그레이드를 만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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