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속에서의 성장
요즘 MZ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단어 중 하나는 "삼귀다"이다. 삼귀다는 사귀다의 전 단계, 즉 연애로 발전하기 전의 미묘하고 애매한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삼귀는 중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관계를 정의하기가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얼마 전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친구는 소개팅을 통해 알게 된 사람과 자주 연락하고 만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럼 둘이 사귀는 거야?" 친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삼귀는 중이지." 이 말을 듣고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른 것은 그 애매한 관계의 경계였다. 둘은 분명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관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삼귀다는 개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걸까?
삼귀다는 관계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우리에게 독특한 자유를 제공한다. 정식 연애로 발전하기 전의 부담을 줄이고, 서로에 대한 기대치도 낮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모호함은 불안을 동반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불투명하다. 이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의 의미를 탐색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타인은 나를 규정하는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삼귀는 관계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관계의 방향을 고민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탐색한다. 삼귀다라는 애매한 상태는 바로 이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귀다는 단순히 연애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태다. 우리는 종종 친구, 동료, 가족 등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관계가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다층적임을 보여준다. 삼귀다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단순히 유행어나 농담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드러낸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저서 <나와 너(I and Thou)>에서 인간관계를 "나-그것"과 "나-너"로 구분했다. "나-그것" 관계는 사물처럼 상대를 객관화하는 관계이고, "나-너" 관계는 상대를 온전히 주체로 바라보는 관계다. 삼귀다의 상태는 "나-그것"과 "나-너"의 중간에 있는 애매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동시에 단순히 객관화된 관계로 머물고 싶지도 않다.
삼귀다가 현대인의 관계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관계의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SNS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지만, 이 관계는 깊이보다는 폭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몰입하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소통하며 관계를 유지한다. 삼귀다는 이러한 현대인의 관계 방식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 서로를 깊이 알기 전에 먼저 가볍게 관계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심리학적으로도 흥미롭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애착 유형에 따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르다. 불안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쉽게 의존하지만, 동시에 거부당할까 두려워한다. 반면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관계의 깊이에 부담을 느끼며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삼귀다는 이런 애착 유형이 관계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삼귀다는 종종 유치하거나 가벼운 관계의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애매한 상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바로 관계를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삼귀다는 우리가 완벽한 답을 찾기 전에 질문을 던지고,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철학자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삶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귀다라는 관계 역시 완벽히 이해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며 관계의 의미를 깨닫고, 때로는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
삼귀다는 관계의 미완성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우리에게 유연성과 자유를 제공한다. 삼귀다는 단순히 "사귀기 전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고 탐색하며 배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삼귀다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삼귀다는 단순히 현대인의 유행어나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본질적 복잡성을 드러내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는지를 보여준다. 삼귀다는 혼란스러운 경계 속에서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삼귀다의 상태에서 머무를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애매함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삼귀다는 단순히 시작이 아니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단계일 것이다. 그러니 삼귀는 관계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