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흥미로운 프로필을 발견했습니다. 'K-POP 덕후, 등산 애호가, 베이킹 마니아, 고양이 집사'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 우리는 이런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어중간하다'고 평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여러 취미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들을 우리는 '겸덕'이라고 부릅니다. 겸덕은 두 개 이상의 분야를 오가며 취미와 덕질을 동시에 즐기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의 취미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거나, 축구 경기를 보며 전자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덕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몰입하는 이들의 다채로운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겸덕의 모습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다양한 취미를 동시에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한 친구는 K-POP 아이돌을 좋아하는 동시에, 게임 스트리머들의 영상을 챙겨보며 그들만의 유머를 즐깁니다. 또 다른 친구는 힙합 음악을 듣다가 마음이 차분해지고 싶을 땐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특정 영화나 드라마의 팬이면서도 전문적인 수준의 베이킹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겸덕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관심사를 동시에 즐깁니다. 그들의 방 한켠에는 아이돌 굿즈가 가득한 선반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교한 레고 작품이 놓여있습니다. 책장에는 판타지 소설과 철학 서적이 나란히 꽂혀 있으며, 컴퓨터에는 게임과 작곡 프로그램이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겸덕의 공간은 그들의 다채로운 관심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우주와도 같습니다.
한 사람의 관심사가 여러 분야로 뻗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OST를 듣다 보니 작곡가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작곡가의 이야기를 찾다 보니 연주 영상까지 챙겨보는 식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바흐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게 만들고, 바흐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관심이 꼬리를 물며 확장되는 과정에서 겸덕들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더 깊이 있는 즐거움을 찾습니다.
특히 디지털 시대와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이런 겸덕의 문화를 더욱 촉진했습니다. 과거에는 특정 취미를 즐기기 위해 관련 동호회에 직접 가입하거나 잡지를 구독해야 했지만, 이제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 전 세계의 다양한 취미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과 같은 플랫폼은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고 탐색하는 창구가 되었고, 사람들은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라 예상치 못한 취미 세계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겸덕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겸덕들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고,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영화 감상을 좋아하던 사람이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영화 속 음식을 재현하는 콘텐츠를 만들거나, 음악과 그림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음악의 리듬과 선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식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창의성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들이 만나 새로운 조합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미술과 해부학, 공학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겸덕의 문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서로 다른 취미가 교차하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탄생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창의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웹툰 작가이면서 동시에 3D 프린팅을 배운 사람은 웹툰 속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피규어로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기술이 결합한 이런 작업은 덕질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창작물이 됩니다. 베이킹과 천문학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행성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며 두 취미를 융합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관심사가 만날 때 생겨나는 창의적 결과물은 겸덕 문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창의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테레사 아마빌레 교수는 "창의성은 다양한 분야의 아이디어가 충돌하고 결합할 때 가장 풍부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겸덕들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통해 더 창의적인 사고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다른 취미 활동은 각각 다른 사고방식과 접근법을 필요로 합니다. 체스는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그림 그리기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을, 음악은 수학적이면서도 감정적인 이해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사고를 오가며 여러 취미를 즐기는 겸덕들은 자연스럽게 인지적 유연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겸덕들은 하나의 취미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다른 분야에서도 새로운 즐거움을 찾습니다. 이는 '몰입(flow)'이라는 심리적 개념과 관련이 깊습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진정한 행복은 몰입의 순간에서 발견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취미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영역에서만 몰입감을 찾을 수 있지만, 겸덕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몰입의 경험을 반복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특정 분야에 지나치게 몰입할 경우 번아웃(burnout)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때 열정적으로 즐기던 취미가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의무가 되어버리는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겪어봤을 것입니다. 겸덕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른 취미로 관심을 전환함으로써 정신적 균형을 유지합니다. 한 취미에서 지치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몰입과 성취감을 얻으며 활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쓰다가 막힐 때는 유화 그림을 그리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요리와 등산을 병행하며 자연에서 느낀 감각을 요리의 아이디어로 활용하는 식입니다. 이런 겸덕의 삶은 서로 다른 취미를 통해 지친 마음을 회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영감과 창의성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스콧 배리 카우프만은 "여러 취미를 병행하는 것은 인지적 유연성을 키우고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완전히 다른 성격의 취미를 함께 즐길 때 그 효과가 더 큽니다. 예를 들어 정적인 독서와 동적인 달리기를 함께 하거나, 논리적인 프로그래밍과 감성적인 음악 연주를 병행하는 식입니다. 이런 대비되는 활동은 뇌의 다양한 영역을 자극하고 정신적 피로를 효과적으로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여러 취미를 오가는 겸덕의 생활 방식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도 기여합니다. 한 분야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다른 영역에서의 성취가 균형을 맞춰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자신감과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요소가 되며, 더 도전적인 시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겸덕들은 다양한 관심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덕질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점이 많아지고, 예상치 못한 연결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K-POP 팬이면서 동시에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두 영역의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더 풍성한 관계를 쌓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장소"라고 말했습니다. 겸덕의 문화는 바로 이런 관계의 확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히 덕질을 즐기는 것을 넘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공감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위안을 찾게 됩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양한 취미는 '약한 연결(weak ties)'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약한 연결이란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 같은 강한 유대관계가 아닌, 취미나 관심사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는 이런 약한 연결이 새로운 정보와 기회를 얻는 데 더 유리하다고 설명합니다. 여러 취미 그룹에 속한 겸덕들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약한 연결을 형성하게 되고, 이를 통해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서로 다른 취미 커뮤니티 사이를 오가는 겸덕들은 일종의 '문화적 번역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과 힙합 모두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두 음악 장르의 연결점을 발견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 집단 간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런 역할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문화적 다양성과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관계망이 온라인으로 확장되어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지리적 제약 없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이너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과거에는 주변에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웠던 경우도, 이제는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의 동호인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취미를 더 깊이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겸덕 문화가 확산되며 우리는 더 이상 한 가지 취미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관심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취향을 동시에 즐기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을 꾸준히 탐구하고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과거에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요 요소였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취미와 관심사가 자아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직업이 아닌 취미를 통해 답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자기소개란에도 "회사원, 프로그래머, 경제학 전공"보다는 "여행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 영화 덕후, 주말 베이커"와 같은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일과 여가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는 현대 사회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직업 세계에서 취미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아 정체성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직장이 바뀌고 직무가 변해도, 내가 좋아하는 취미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로 남는 것입니다.
겸덕들은 다양한 취향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만들어갑니다. 단순히 많은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깊이 빠져듭니다. 이런 과정은 자기 이해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취미를 탐색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성향, 재능, 가치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자아 발견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겸덕 문화는 이런 자아 발견의 여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여러 취미를 통해 자신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고 표현함으로써, 더 통합적이고 균형 잡힌 자아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겸덕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너무 많은 취미에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킴으로써 어느 하나도 깊이 있게 발전시키지 못하는 '얕은 경험'에 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능 재주꾼, 전문가 없음(Jack of all trades, master of none)'이라는 표현처럼, 다양성이 깊이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겸덕의 본질을 오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덕은 단순히 취미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심사에 진심으로 몰입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겸덕들은 여러 취미 중 하나 또는 두 개 정도의 '메인 덕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다른 취미들이 보완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위의 격언은 사실 불완전하게 인용된 것입니다. 원문은 "만능 재주꾼, 전문가 없음, 그러나 종종 하나보다 낫다(Jack of all trades, master of none, but oftentimes better than a master of one)"로, 다양한 기술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래 사회에서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단일 분야의 전문지식보다는 여러 분야를 연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더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겸덕 문화는 미래 사회에 필요한 유연성과 창의성을 키우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겸덕 문화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더 많은 것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보다 경험과 관계의 가치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트렌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겸덕 문화는 취미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관심사를 통합적으로 즐기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보여줍니다. 여러 취미를 오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조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겸덕들은 창의성을 발휘하고, 더 풍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의 다채로운 정체성을 발견해 나갑니다.
이러한 겸덕의 문화는 단순히 취미생활의 트렌드를 넘어,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응하는 하나의 적응 방식이자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고 여러 관심사를 유연하게 탐색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빠르게 변화하고 다원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결국 겸덕의 문화는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 대상을 꾸준히 탐구하고 사랑하는 태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여정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경계 없는 취미 세계의 매력이 아닐까요. 다양한 취향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만들어가는 이 여정은, 더 풍성하고 의미 있는 일상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