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Mar 05. 2022

서로를 밝히는 밤

[독서노트] 『밝은 밤』 최은영


엄마가 중고서점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밝은 밤』을 다 읽었다고 했다.


- 엄마 최은영 알아?

- 이번에 봤는데 좋더라고. 이 사람이 주로 여자들 이야기 쓴다며?

- 응. 와, 나도 아직 안 읽었는데?


엄마에게서 내가 아는 작가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책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고 당장이라도 인터넷 서점에 주문하고 싶었지만, 집 공간을 최대한 비우기로 한 결심과 더불어 종이책을 더는 사지 않기로 했기에 도서관에 대출 예약을 걸어놓고 기다렸다. 내 순서는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자책 말고 꼭 종이책으로 보고 싶었는데, 전자도서관에 걸어놓은 예약 순번이 먼저 돌아왔다. 하필이면 전자책 단말기도 내 손에 없는 때였다. 피로감 심한 아이패드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눈이 건조해지는 줄도 모르고 하루 만에 다 읽었다.


- 엄마가 이 책을 왜 좋아했는지 알겠어.

- 왜?

- 엄마 이야기네. 할머니 이야기고.

- 그러게. 나 최은영 다른 책도 읽었다?


다시 한번, 엄마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밝은 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들과 그들의 엄마들과 그들의 할머니 중 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의 이야기라도 될 수 있는 보편성이 마음을 울렸다. 나의 엄마가 너의 엄마가 되고 이 아이의 할머니가 저 아이의 할머니가 되는 경험을 했다.


지연의 증조모 삼천은 일본군에게 끌려갈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남자와 결혼하여 산다. 삼천은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증조부의 결단 뒤에는 구원자를 향한 허영심이 있었다. 삼천은 평생을 남편에게 빚진 사람처럼 살아간다. 소위 깨어있는 천주교도로 천한 신분의 삼천을 구해 주었다가 자기 또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는 증조부의 자기 진술은 평생 삼천이 그의 종이 되어 살게 했다. 삼천을 사람으로 봐준  오랜 동무인 새비 아주머니뿐이었다.


삼천의 딸 영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그는 아내보다 자신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영옥이 딸을 낳고 나서야 그의 중혼 사실을 알게 되는데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본처를 찾아 떠나고 영옥은 자기가 낳았으나 법적으로 아무 권리도 없는 미선을 홀로 키우게 된다. 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결혼을 허락한 증조부는 영옥에게 ‘남자 마음 하나도 잡지 못한다’는 비난을 퍼붓고 처음으로 삼천은 남편에게 대거리한다.


영옥의 딸 미선은 어떤 연유로 첫딸을 잃는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남편과 가정을 지켰다는 것은 미선의 자부심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자부심이 슬프게도 둘째 딸 지연을 아프게 했다. 위로가 서툰 영옥은 미선을 아프게 했다. 그럴 운명이었을 거라는 엄마의 위로에 자식을 잃은 미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고 두 사람은 서서히 멀어진다.


미선의 둘째 딸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다. 지연은 자신이 엄마나 아빠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사실 부모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어떤 것을 사회에서 용인해 줄 리 만무한 법이다. 그래서 지연은 엄마가 절대 찾아오지 않을 곳, ‘희령’으로 내려간다. 희령은 영옥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영옥과 지연이 만나 증조모와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지연이 이별 후의 자신의 일상을 정돈해가는 과정이 이 책의 줄거리다.






나의 할머니는 주인 될 자를 찾아 할아버지와 결혼했다. 막내딸로 자라 험한 일 해 본 적 없는 할머니가 장손에게 시집와 그 집의 종이 되어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며느리가 됐다. 할머니는 일이 너무 힘들어 눈물바람을 하다 산을 넘어 도망가기로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했다. 옷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하필이면 그 집에 시아버지의 지인이 있어 크게 혼나고 시집으로 돌아왔다 한다. 할머니에게 주인이 필요했던 이유는 주인이 없는 여자가 험한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주인을 만났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야 했고, 쉴 틈 없이 아이를 낳았고 길렀고 일했다.


나의 엄마는 친정의 불행이 지긋지긋해서 결혼을 선택했다. 동생이 줄줄이 딸린 집 장남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엄마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꼭 앞날이 훤한 이 결혼을 해야겠냐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친정 가족이 만류할수록 결혼에 대한 결심을 굳혀갔다. 자신을 불행하고 힘들게만 한 사람들과 이별하고 싶었다 했다. 엄마는 훗날 내게 ‘돌멩이 피하려다 물진창에 빠진 격’이라는 표현을 한다. 엄마의 40년을 여기에 굳이 다시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 안전한 우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얻고 싶어 결혼했다. 가정을 이룸으로써 완전함을 얻고 행복한 미래를 일구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거슬리는 어떤 것들을 무시했다. 자기기만이었다. ‘어머님, 아이 아빠가 제 말을 듣지를 않고 자꾸 마음대로 행동해요.’라고 투정처럼 가볍게 던진 말에 시어머니는 ‘그건 네 탓이다. 네가 말을 듣게 만들어야지.’라고 답했다. 미래의 내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과거의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으면 없는 것이 될 줄 알고. 내가 이 길을 선택했으므로 예비되어 있던 일들이 일어났고 컴컴한 터널 속에서 길을 찾아야만 했다.






지연은 천문대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다. 우주를 관찰하는 것은 영옥 할머니와의 대화와 더불어 지연의 삶을 정돈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신기하게도 나 또한 우주의 무한성에서 해답을 찾았다. 끊임없이 팽창하는 공간 속에서 너와 나는 필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가까이 닿아있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한데, 그래서 만남이라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닿았을 무렵에 모든 것은 ‘겪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맞닿았을 때 서로를 보듬고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좋았던 시간을 연료 삼아 다시 살아가는 것. 그러다 우연히 다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것, 혹은 가슴속에 간직하다 가끔 꺼내어 볼 수 있는 희령에서의 사진 같은 추억, 이런 것에 기대어 사람이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실존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인물들이 잠시 나와 맞닿았다가 사라진 그 순간이 오래도록 내게 위안이 될 것만 같다. 『밝은 밤』에 등장하는 남자들, 삼천과 영옥과 미선과 지연의 남편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안해하지도 않으며 미안한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미안한 일을 마음 편히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미선, 지연 또한 크고 작은 갈등이며 미안한 일과 상처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지만, 서로에게 사과를 하고 편지를 썼다. 그래서 상처는 완벽하지 않아도 얼기설기 봉합됐다. 상처를 받은 자는 기꺼이 그 흉터를 덮었다. 나는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사과받지 못한 어떤 일을 떠올리고 울었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미선, 지연이 다가와서 나를 위로했다.






내가 최은영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동시대를 공유하는 사람이라서였다. 내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대신 써 주는 사람이라서였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설명하기 어려우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건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밝은 밤』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도 할머니도 남들에게 건네줄 수 있는 책이었다. 인물 중에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지연으로 대치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연이 서술하는 모든 구절을 필사해도 모자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말로 내게 다가온 공감과 울림이 얼마나 컸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해요, 최은영!



작가의 이전글 2022년 2월 마지막 주 | 별의 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