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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적 한계를 알고 싶다면?

논문을 쓰시면 돼요

by 선지유

언제까지 논문 얘기 할 거냐고? 사실 지난 글에 논문 이야기를 자세히 풀고 싶었지만 일단 프랑스식 논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부터 해야겠다 싶어 설명을 시작하다 보니 그만 글을 통째로 삼켜버렸다...그런 의미로 이번에는 진짜로, 진짜로 석사 논문 썼던 경험을 써보려 한다.


미술경영학교에 편입했을 무렵부터 나는 석사를 국립대학에서 할 생각으로 일찌감치 준비했었다. 3학년에 올라가고 인턴십, 학사논문에 여러 개인적인 사건들까지 엮여 정말 정신없는 1년이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준비해 지원했고, 다행히 파리 3대학교의 문화경영 석사 1학년에 합격했다. 내가 석사 1학년으로 재학 중이었을 때는 당장 학년이 끝나기 전까지 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왜 2학년이 아니고 1학년 때 쓰느냐. 우선 프랑스 대학원은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자동진급이 안 될 뿐더러 (1학년 마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 2학년을 마치고 싶다면 새로 지원해야 한다), 교수님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30-40페이지 규모의 소논문을 제출하거나, 논문 목차와 도서목록만 제출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한 학년만에 풀 논문을 제출하길 원하는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두었었다. 지도교수를 정하는 건 순전히 학생의 몫이니, 내가 내 무덤을 판 셈이다.


아무튼 학기 초부터 논문 집필을 시작해야 하니, 전공 불문하고 교수님들은 학기 초부터 논문 주제를 일찍 정하라고 초장부터 바람을 잡았다. 어린 시절 받은 얼마 안 되는 주입교육의 여파로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하고 싶은 주제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학사 논문 때 다뤘던 "만화와 네오팝" ("Le Manga et le Néo-pop")의 연장선을 다루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1학기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때, 현대미술 강의 교수님께 내 논문 지도교수를 부탁드렸다. 당시 순수하게 미술을 주제로 잡고 논문을 쓰려는 학생이 없었는지, 교수님은 내 주제를 상당히 흥미롭게 봐주셨다.


아이디어 하나를 학문적 구조를 갖춘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힘들다. 매순간 지적 한계를 시험받는 기분이랄까. 미대에서 그림 그리던 시절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미대 때만 해도 내 작업물의 '이유'를 시험받았다면, 지금은 육하원칙으로 질문이 6배로 늘어났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왜'. 모든 논문의 시작은 이 육하원칙 이전에 하나의 '질문' (Problématique)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토대로 이전 글에 언급한 "인트로 - 테제 - 안티테제 - 진테 - 결론"의 기본적인 골격을 입혀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을 하면서 풀어내는 방식이다. 첫 질문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그 질문을 어떠한 경로로 풀어낼 것인지, 어떠한 오픈 결말로 이어갈 것인지가 중요한 작업이다. 물론 모든 과정에 수많은 서적과 글을 바탕으로 한 창작+논리를 곁들여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쓰고 있는 나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글을 써보신 이들은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끙끙대며 완성된 내 논문 주제는 현대미술과 일본 만화의 교집합을 다룬 "만화의 예술성, 하나의 장르로서 현대미술에서의 만화의 응용" ("Art du manga: approche artistique sur le manga et son appropriation dans l’art contemporain")이었다. 막연하게 예술적인 시각으로 만화라는 장르를 분석해보자는 시도는 일본 만화의 역사, 역사에서 비롯된 기법과 스타일에서 지금의 순정만화 특유의 그림체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들과 분석, 그리고 일본 현대미술계에서 만화라는 장르와 기법을 작품세계에 녹아넣은 아티스트들의 사례들까지 이어졌다.


기간을 떠올려 보면 초반 자료수집에만 2개월 이상, 논문의 타이틀이 확정되기까지는 약 3개월, 논문 구조가 완성되기까지는 한 5개월, 그걸 토대로 글을 써서 완성시키기까지 또 3개월 걸렸던 것 같다. 학기 초(9월)부터 제출(5월)까지, 총 작업기간은 8-9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논문을 제출한 다음에는 발표가 있다. 개별적으로 지도교수와 학년 담당 교수 두분을 앞에 두고 논문 발표를 해야 했다.


분량 약 70페이지가량의 글을 9개월 안에 인턴과 강의를 병행하며 쓰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다들 그러고 사는 걸까? 한 학년 동안 주제를 찾고, 자료조사를 하고 교수님을 쫓아다니며 면담을 잡고, 쓰고 수정하고 쓰고 수정하고, 하루에 몇번씩 멘탈이 나가고 울었다 웃었다가. 나는 분명히 프랑스어 능통자였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삶은 전부 거짓말이거나 꿈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어휘력과 단어 응용력을 매분매초 의심했다. 좀더 있어 보이게 쓰겠다고, 좀더 멋있게 써보겠다고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의 좀더 멋있는 동의어를 매번 검색하는 내 모습이 참 웃겼다. 그럴 때마다 지도 교수님은 절대로 문장 복잡하게 하지 말고 단순하게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내 석사기간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마감이 있었던 5월달이었다. 이 기간에는 일주일에 한번 장을 보는 것 외에는 일체 외출을 하지 않았고, 집에 틀어박혀 글만 썼다. 좁은 원룸의 침대 끝에 앉아 책상 위에 무수히 쌓인 참고서적의 탑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책들을 팔 거치대 삼아 글 작업을 하루종일 했었다. 맨 책상 위에 노트북을 두면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전문 서적을 둘 데가 없어 책상 위에 쌓아두고 팔을 높이 들며 글 작업을 했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아침부터 밤까지 글만 썼고 대체로 밤을 샌 다음 아침에 쪽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글 작업을 했다. 친구들 연락은 다 무시하고 부모님과의 통화도 피했다. (이 기간에 동생이 프랑스 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파리에 오면서 내 원룸에 잠시 지냈는데, 나중에 듣기로 본인이 잠들 때 글을 쓰고 있던 누나가 아침에 일어나도 부동의 자세로 글을 쓰고 있어서 무서웠다고...) 제출은 다행히 제 시간에 맞출 수 있었고, 나는 2주간 손끝에서 팔, 어깨, 등, 허리까지 상체 전체에 근육통을 앓았다. 마지막 발표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한 암기력을 발휘해 논문 발표자료를 달달 외워 발표까지 잘 마쳤다. 결과적으로 성적은 20점 만점 중 17점으로, 학년 전체 중에서도 매우 상위권으로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정말 무대포로 달리기만 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은 시기였고, 프랑스는 연쇄테러를 겪었던 격동의 한 해였기에 참 쉽지 않았던 해였다. 내 인생에 있어 이렇게까지 뇌세포를 쥐어짜낼 수 있을까 싶었던 그 때 그 시절. 지금은 다른 방면으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지만...그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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