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게 반짝이던 초록잎이 어느새 붉게 타들어가고 있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지난 세월과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리는 나는 영락없는 F형 인간이다. 이상하게 가을만 되면 내 안에 깃든 모든 감정이 각양각색의 단풍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별 거 아닌 일에도 눈물이 났다가,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웃음이 났다가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예민하고 민감한 성향을 지닌 나는 이런 내가 종종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매우 민감하고 감정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릴 때부터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너는 너무 생각이 많고, 예민하며, 사람들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 “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마치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때마다 나는 감정적인 내가 정말이지 별로였다. 참다가 터진 눈물 한 방울에도 죄책감을 느꼈고,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비집고 나와 짜증으로 표현되었을 때도 오로지 내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감정적으로 태어난 내가 밉고, 싫었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이성적이고 논리분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존재인가, 나는 왜 한순간도 생각을 멈출 수 없고, 소음과 빛, 모든 것에 민감한 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별 거 아닌 일들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들을 했다.
나는 고슴도치였다. 거꾸로 된 고슴도치. 밖을 향해서가 아닌 안으로 가시가 자라나는 고슴도치. 자꾸만 자라나는 가시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굵어지고, 날카로워졌다. 다채로운 감정들이 방울방울 생겨날 때마다 나는 생겨난 가시들로 방울을 톡 톡 하며 하나도 남김없이 터뜨렸다. 여전히 내 머릿속엔 감정적인 사람=죄인, 이상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상태로 숱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니 자주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감정적인 내 모습 대신 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로 나 자신을 꽁꽁 감추며 살았다. 쿨한 척, 다 이해하는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척척척. 어느새 이십 대 후반이 되고 나니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장 거대하고 두꺼운 껍데기 속에 갇혀 덜덜 떨고 있는,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런 나를 구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감히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를 직면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토록 못나고 별로인, 상처투성이인 나를 마주하는 일은 내가 만든 멋진 페르소나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었고,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내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스무 살 후반. 인간관계도, 가족도, 회사도, 연인관계도 모든 게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갖가지 질병에 걸려 온갖 염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가시들은 내 내면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주변까지 뻗쳐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 온전히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삶은 나를 고독으로 이끌었다. 돌아보니 내게 주어진 고독의 시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이끌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독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올라오는 감정들을 모두 허용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으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자주 울었다. 그동안 참았던 모든 눈물을 쏟아냈고, 절대로 참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원하는 만큼 실컷 울고, 또 울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냈다. 화가 나면 실컷 분노를 느꼈고, 글로 표현하거나 연습장에 마구 볼펜으로 긋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들을 하나둘씩 풀어낸 지 2-3개월이 되자 무언가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민감한 사람이었고,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감정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 거세게 튀어 오른다는 것, 민감한 사람은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는 원래 감정이 다채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진정한 내 모습을 관계 속에서만 찾으려 애썼다. 그러니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맞추려 할수록 내가 만든 가면은 더 두꺼워져만 간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마주한 고독은 처음에는 혹독하게 느껴졌으나 그 시간은 쌓여온 껍데기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내 본래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해 준 건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닌 오직 내가 나와 함께한 시간들 속에서였다.
민감한 사람일수록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잘 흡수할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전에는 나와 대화하는 일이 가장 어색하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때 그 고독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고독의 시간에서 나를 마주하지 않고 또다시 다른 ‘중독’으로 회피하려고 했었더라면 나는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로소 민감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사랑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 길로 가는 여정에 서 있으며 그 길을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