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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평행선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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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주 Oct 13. 2024

유민의 시선

우정소설

 유민은 어떻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평소에는 고민이랄 것도, 딱히 깊은 사유나 생각이랄 것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고민이 되었다. 유민은 생각했다. 예전에는 결혼이란 걸 떠올리면 그저 웨딩드레스를 입고 많은 축하를 받으며 입장하는 게 다인, 그러고 나서 신혼생활을 어느 정도 즐기다가 아이를 갖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단순한 생활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준비하며 느낀 것은 결혼이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이 사람이 좋고, 사랑해서 결혼이라는 걸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그 절차는 복잡했고, 서로의 가족이 얽혀있다는 게 특히나 보통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고민들을 그동안 지혜와 나누지 못하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지혜와 다툰 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만의 선택을 거듭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 전에는 고민거리가 있거나, 걱정되는 게 있으면 무조건 지혜에게 털어놓는 게 1순위였다. 유민은 생각을 깊이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인 즉,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피해왔던 수많은 감정과 아픔 혹은 분노들에 가차 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할 거라 여긴 유민이었으나, 어른이라 불릴 만한 나이가 되어갈수록 자신의 생각은 망상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럴수록 더 지혜에게 의존하기를 선택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늘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주는 게 더 편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딱히 하고 싶은 게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모르는 상태가 익숙하고 당연했다. 자연스레 학교도, 직업도, 취미도 전부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살게 되었다. 그 외 아주 사소하고 작은 선택과 결정들은 전부 그녀의 단짝인 지혜의 몫이었다. 지혜는 그 결정을 내려주는 일들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오히려 유민의 삶이 자신의 삶인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자연스레 유민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지혜는 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자신의 일로 항상 바쁜 상태였고, 그런 지혜를 마냥 붙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민은 지혜와 처음으로 크게 다툰 날, 거대한 폭풍우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무언가 크게 뒤바뀐 느낌. 유민은 지금껏 참아 온 모든 감정들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으로는 '이제 그만해야 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무지 제어가 안 됐다. 처음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하는 유민을 보며 지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버버 하는 표정을 지으며 몇 초 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껏 지혜가 유민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을 거침없이 전하고, 뱉어냈으며 한쪽은 혼내고, 한쪽은 한 귀로 듣고 흘리는 다툼의 패턴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자신의 할 말을 논리적으로, 단어 하나 틀리지 않으며 말하는 유민은 지혜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지혜한테는 잘 이야기했어?"

 J가 여전히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후후 불며 물었다. 어찌나 날이 추운지, 카페 안에서도 몸이 덜덜 떨려 외투를 벗지 못하는 유민과 J였다.

 "응. 근데 흠. 잘 모르겠어."

 "뭘 잘 모르겠다는 거야?"

 "분명 지혜는 웃고 있었고, 축하해 줬는데 이상하게 표정이 오묘했단 말이지."

 "음. 그래?"

  마침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J는 온몸으로 전해지는 커피의 따스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몇 모금 연거푸 커피를 연달아 마신 후, 다시 입을 뗐다.

 "네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보인 게 아닐까? 계속 말하기 전에도 고민했고, 싱숭생숭하다 그랬잖아."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유민은 다툰 날, 지혜가 쏟아낸 말들을 떠올렸다. 자신은 어쩌면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할 거라는 말과, 유민이 연애할 때 느꼈던 질투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들. 늘 유민의 연애에 온갖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정작 연애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소개팅의 경험만 빈번한 지혜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민의 무의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한 순간, 축하보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같은 관계로 존재하게 될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꼭 지혜에게만 이런 감정이 드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잘 이야기했어. 네가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친구니까 분명 지혜도 축하해 마지않을 거야."

 "맞아. 그때 본 표정은 내 감정을 투영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지."

 "지혜란 친구는 정확히 어떤 친구야? 너랑은 완전 반대라고 그때 들었던 것 같은데."

 "음. 지혜는 말이야."

 유민은 그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과거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지혜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활기찼고, 똑똑했다. 소위 요즘 말하는 '인싸'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딜 가나 주목받았고, 명랑했고, 자신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의 모습이었다. 유민이 가장 가까운 곁에서 바라본 결과, 지혜는 생각보다 상처를 잘 받고, 꽤 오랫동안 상처를 곱씹고, 과거에 관한 후회나 자책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밝은 이면의 뒤에는 생각보다 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자신이 가진 어둠의 한 조각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유민과 달리, 지혜는 항상 자신에게만 의지해 온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 있을 줄 몰랐어.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거야?"

 "그냥. 사람들한테 부정적인 내 감정 옮기고 싶지도 않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지혜야. 제발 나한테라도 이야기하라니까."

 "그래서 너한테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텐 죽어도 말 못 하는데, 그래도 너한텐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하며 슬픈 표정을 짓다가도 금세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지독할 정도로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티 내지 않으려 하는 지혜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나 발 벗고 나서주는 사람이었다. 한 때 유민은 지혜가 자신만의 친구가 아니란 것에 서운하기도, 질투가 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혜가 가진 본연의 특성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이상하게 연애는 잘 되지 않았다. 직장도 좋고, 얼굴도 몸매도 아름다웠던 그녀가 왜 그토록 연애를 잘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씩 짐작이 갔다. 그녀는 의지할 줄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의지하지 못할 가정환경에서 자라났고, 그녀에게 의지할 곳이란 -그것도 겨우- 친구인 유민 외에는 없었다. 그녀 곁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녀의 성가신 외로움을 잠시 가라앉혀 줄 가벼운 '지인들'에 불과했고, 지혜는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떠다니는 먼지 같은 존재라 여겼다. 

 유민은 지혜가 이런저런 일들을 곧잘 해내고, 누구와도 잘 지내며, 커리어든 자기 관리든 빠지지 않는 지혜가 정말로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이라 생각했다. 가장 성공한 현대 여성을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도 지혜였다. 그러나 그것 외에, 외부적 요소를 제외한 모든 정신적 혹은 내면적 요소에 있어서 지혜는 무언가 깊은 결핍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절대로 내보이고 싶지 않은 지혜는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그 결핍을 감추고, 꽁꽁 싸맸지만 가장 가까웠던 관계인 유민에게는 지혜의 그런 눈물겨운 시도들이 전부 다 느껴지고 보였다. 다만 자신이 보는 모든 걸 지혜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어쩌면 신은 공평한 것도 같았다. 신은 때론 불공평하게도, 공평하게도 느껴지는 데 그것은 삶에서 내가 어떤 환경과 처지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유민이 느끼는 신은 공평하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신이 지혜에게만 모든 걸 내어주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지혜에게 없어도 유민에게 있는 게 있었고, 유민에겐 없어도 지혜가 가진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비로소 보였으니까.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였다. 모든 걸 '나' 자신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된 것과 상대방을 향한 진실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 지혜는 점점 평행선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J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고개를 여러 번, 천천히 끄덕였다. 지금껏 유민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민이 너랑 지혜는 어쩌면, 인정하긴 싫어도 '시절 인연'이었는 지도 몰라. 나도 소위 불알친구라 생각했던 놈 한 명이랑 몇 년 전에 손절했었거든. 서로한테 삿대질을 하면서, 세상에 있는 욕이란 전부 그놈한테 했던 것 같아. 같이 지낸 세월이 긴 만큼, 서로를 대하는 데 너무 거침이 없었거든. 그 친구도 나한테 마찬가지였고. 그 후론 다신 안 봐. 처음엔 진짜 힘들었지. '아. 이게 맞나. 우리가 쌓아 온 세월이 몇 년인데.'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면서 추억을 곱씹었지. 근데, 시간이 가니까 점점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 한 친구라도 시절 인연이 될 수 있구나. 이미 우리의 끈은 끊어져 있는데, 내가 끊어진 끈을 보는 게 두려워서 끝까지 못 놓고 있던 거더라고. 유민이 너도 서서히 멀어지는 과정이 눈에 보이고, 세월의 흐름이 둘을 갈라놓는 것처럼 느껴져서 두려운 거겠지. 근데 지나고 보면 지금 느끼는 감정도 흐려지고, 옅어져.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너무 둘이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둘이 가는 길이 평행선이라도 해도, 좀 더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냥 흐름에 맡겨보는 게 어때? 너는 관계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최선이라. 잘 모르겠어. 난 언제나 지혜보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느껴져서, 지혜도 나를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 같아."

 "아니지. 지혜는 너 외에 아무에게도 의지하려 들지 않았으니까. 네가 그만큼 지혜한테는 나무 같은 존재였던 게 아닐까? 그나마 기대어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나무 말이야."

 "오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는 거지만, 항상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 같아."

 "에이. 나도 부정적인 생각 엄청 많이 하는 데 뭘."

 "진짜 부정적인 사람은 그렇게 말 안 해. 계속 부정적인 말을 연달아서 하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 기를 쪽쪽 빨아가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런가? 네가 날 좋게 봐줘서 그런 거 같은데?"

 "그럼, 난 시선이 긍정적인 걸로. 후후."

 "그래. 넌 시선이 긍정적, 나는 생각이 긍정적. 그럼 긍정적인 사람들끼리 만난 거네?"

 "맞아. 그래서 이렇게 좋은 건지도 몰라."

 유민은 J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고 있을 때가 많다는 걸 떠올렸다. 예전에는 오직 지혜만이 자신의 진짜 웃음을 꺼내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J는 그 순간을 단숨에 깨트려주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J를 만났을 때는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엔 좋다고 하면서 또 나를 짓밟고, 무시하겠지.'

 '사람 좋은 척해봤자 잠깐인 거 다 알아.'

 '금방 떠날 거잖아. 결국엔 너도.'

 그토록 수많은 연애를 했고, 때로는 오랜 시간 연애를 했던 그녀였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항상 그녀에게 끝을 고했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고, 귀찮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전부 다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사람이라 느껴지는 사람도 뒤에 가면 다 변했기 때문이었다. J라는 사람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유민은 자신이 가장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지혜에게 소리를 지르고, 모든 감정을 내비치게 된 후 한순간에 뒤바뀐 자신의 내면은 일상 속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약을 먹을 만큼 괴롭혔던 상사에게도 예전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는 이야기 하지 않게 됐다. 확실히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을 피곤하게만 했던 민주에게도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민주를 맞춰줬는지, 자신에게 얼마나 그녀에 무례했는지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유민은 지혜와의 다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자기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지혜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혜와의 다툼이 유민에게는 인생을 변화시켜 줄 계기가 되어준 것이었다. 연에도 자연스레 모습을 바꾸었다. 지금까지의 연애는 유민이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툼이 싫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게 싸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항상 맞춰주는 게 습관이 되니 상대방은 유민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맞춰주는 것 같지 않다 느낄 때면 화를 내기가 부지기수였다. 유민은 그런 연애를 반복할 때마다 자존감이 자꾸만 낮아졌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어쩌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J와도 초반에는 자꾸만 트러블이 생겼다. 당연했다. 그런데 지혜와 다툰 후로는 J와의 싸움에도 다르게 대응할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생각을 오목조목하게 말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감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혜와는 점점 평행선을 이루면서도 자신의 삶은 무언가 제자리를 찾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생은 단 하나도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영원한 우정이라 믿었던 믿음은 자꾸만 힘을 잃고 부스러졌고, 평생 가면을 쓴 채로 연기하며 살 것만 같았던 인생은 껍데기를 벗고 훤한 속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속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단단했고, 빛이 났다.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삶은 자신이 생각한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고, 아무것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으며, 흐름에 저항하는 순간 남는 건 괴로움일 뿐이란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무엇일까. 세상은 온통 변화하는 것들 뿐이었다. 온통 흐르고, 변화하고, 깨지고, 부서지고, 다시 재조립되고, 만들어지며, 완성되고 또다시 부식되는 것들 투성이었다. 유민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더는 지혜가 아닌 J라는 사실과 인생의 선택을 더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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