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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Mar 13. 2024

집밥요정 돌아오다

오늘 저녁은 뭐 해 먹지? 된장국이라도 끓일까? 아, 육수 끓여 놓은 것이 없지? 밥 하기 귀찮은데 외식할까? 리마 좋아하는 떡볶이 먹으러 갈까? 리마아빠 좋아하는 갈비? 그러고 보니 짜장면 먹은 지 오래됐네. 그래! 오늘 저녁은 중국집이다!

수업준비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린 걸 몰랐네. 밥 할 시간도 없고 오늘은 간단하게 배달이나 시켜 먹어야겠어.

오늘따라 수업하는 애들이 말을 안 들어 너무 지쳤어. 밥 할 기운도 없어. 이런 날은 삼겹살에 막걸리 한잔 해야지!


나는 한때 집밥 요정이었다. 알레르기를 가진 아이를 키우다 보니 유난히 먹는 재료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뭐가 들어간 지 확인이 어려운 음식을 먹일 바엔 힘이 좀 들어도 내 손으로 안전하게 만들어 먹이는 게 낫겠다 싶어 오랜 기간 동안 집밥을 고수해 왔다. 음식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뭐든 계속하면 는다고 음식 솜씨도 늘기 시작했다. 손맛 좋은 친정엄마를 둔지라 엄마가 했던 맛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얼추 흉내를 내면 먹을 만한 음식이 만들어졌다. 집밥 해 먹는 게 재밌었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아이가 맛있다고 연신 엄지 척을 해주고 아이 아빠가 저녁을 먹으면서 ‘아~행복하다’라고 할 때면 묘한 희열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난해 일을 시작하면서 집밥을 향한 애정은 싸늘히 식기 시작했다. 밥을 하는 그 모든 과정이 귀찮고 싫어졌다. 날이 어둑해지면 부엌살림들을 째려보며 외식할 핑곗거리를 찾아서 식구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남이 해준 음식은 뭐든지 다 맛있어서 하루하루 사는 맛이 났다. 몸도 편하고 입도 즐겁고 ‘이렇게 살려고 돈을 버는 거구나.’ 싶었다


어느 저녁, 경제 공부에 한창 빠져 있던 남편이 지출을 정리해 보자고 제안해 왔다. 맞벌이를 시작했으니 저축이 좀 늘었을 거라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늘어난 외식비로 인해 저축은커녕 내가 버는 것보다 많은 금액을 외식비로 쓰고 있었다. 문제는 새어 나가는 돈만이 아니었다. 다 나았다고 자부했던 아이의 아토피가 다시 시작되려는지 밤마다 다시 등을 긁기 시작했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 나타나는 나의 손바닥 습진도 스멀스멀 올라오며 적신호를 보내왔다. 외식을 하면서 묻어두었던 마음 한켠의 불안감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편하고 좋은 것만 찾다가 돈도 잃고 건강도 잃게 생겼다.


문제도 알고 해결책도 알지만 다시 예전 집밥요정으로 돌아가기엔 시간도 없고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다. 갖가지 야채와 멸치를 넣어 떨어지지 않게 육수를 내어두고, 돼지안심을 사다가 밀계빵 순서로 손수 돈가스를 만들고, 갈비를 사다가 몇 차례 물을 바꿔가며 핏물을 빼고 오래오래 정성 들여 갈비탕을 끓였던, 거기다 음식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그 많은 설거지들을 감당해야 했던 수고를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은 뭐라도 해 먹어 봐야지 하고 마트를 향했다가 코인육수라는 것을 발견했다. 육수도 없는데 이걸로라도 국을 끓여보려는 마음에 담아 왔다. 그렇게 만나게 된, 집밥 요정에게 신세계를 안겨 준 코인육수. 어떻게 여태 이걸 몰랐을까. 어떤 음식을 하던 맛집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묘약. 코인육수 한알로 된장찌개를 끓이면 유명고깃집 된장찌개 되고 어묵국을 끓이면 몇십 년 전통의 일식집의 깊은 국물 맛이 났다. 떡볶이는 또 어떤가. 며느리도 안 가르쳐준다는 비법 떡볶이 못지않은 맛을 내줬다.


혼자 하기 버거운 숙제는 답안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조미료를 쓰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고결하게 살만큼 살아왔으니 이제는 타협하고 조미료의 조력을 받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집부리다 꺾이느니 이리저리 잘 구부러지는 유연함을 가지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다.


집밥만 고수하던 집밥요정은 외식이에게 반했다가 진짜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집밥 요정의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이라는 것을.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거쳐야 한다는 과한 욕심을 버리면 더 편하게 내 가족을, 내 통장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집밥 요정은 다시 집밥을 사랑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옛사랑 집밥을 더 사랑하게 될 새로운 도구를 선물로 사들고 돌아왔다. 육수 코인을 쓰고 참치액도 넣고 미원도 마음 편히 사용하면서 더 깊은 사랑을 맹세했다. 오로지 음식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는 그 시간이 귀한 힐링 시간이었음을 알아차리고선 집밥 만드는 시간을 더 즐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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