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아 눈을 뜨고도 침대에 누워 있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 때문에 기운이 나질 않는다. 마음을 파고들어 콕 박혀버린 그의 말들이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수업 준비로 바쁜 와중에 받은 그의 메시지 내용은 당황스러웠다. 그저 술 좀 줄이고 건강을 좀 챙기라는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날카로운 그의 말들이 되돌아왔다. 더 이상의 비난 섞인 잔소리는 하지 말아 달라고, 자신이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인데 대화가 없는 우리 집이 힘들다고 했다. 괜찮아 보인다고 잘 지내고 있는 건 아니란다. 도대체 뭐라는 거지?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불시의 공격을 받은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잘하는 거냐고, 대화를 원하면 대화하는 자신의 태도부터 고쳐보라고, 따뜻한 말을 듣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그의 말을 따박따박 반박해 나갔다. 너만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쏘아붙여 주니 속이 좀 후련했다.
내 말을 듣고 보니 미안하다는 그의 답장을 저만치 밀쳐 놓고 하던 일을 마저하기 시작했다. 세 시간을 내리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는 수업을 하고 오니 몸과 마음이 넉다운이다. 눕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식사. 하필 오늘 아이는 친구 집에서 밥을 먹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굳이 목소리를 내어 말을 건네기가 싫다. 지친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밥을 먹고선 침묵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다. 집안일에 바깥일에 나는 나대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좀 더 배려하지 못하는 거지? 할 말을 좀 삼키고 살면 안 되는 거야? 그에 대한 원망으로 밤새 뒤척인 참이다. 아이는 학교에 보내야 하니 할 수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식탁에 앉아 엄마가 건네는 시리얼을 받아 들고선 아이는 “아빠 보고 싶어”라고 했다. 또 그 소리. 새벽에 나가는 아빠를 아침에 보지 못하는 아이는 아침마다 나를 보면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제저녁에 봤잖아? 이따 저녁에도 볼 건데 뭐가 보고 싶어? “ 여느 때와 같이 대꾸해 주고 아이 앞에 앉아 시리얼 먹고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는데 코끝이 시려온다.
나도 그랬었는데.. 나도 어제 보고 오늘 또 볼 건데도 그가 보고 싶은 적이 많았었는데.. 언제부터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된 거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서로를 어루만져주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이 언제였지? 새벽에 집을 나서는 그에게 잘 다녀오라며 서로를 안아주던 다정했던 우리는 어디로 간 걸까? 외롭다고, 힘들다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에게 등을 돌려버린 꼴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너랑 결혼한 거라고, 진짜 진짜 잘해줄 거라는 약속을 했던 나인데 약속 따위는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부부가 되고, 같이 있는 것이 일상이 되니 더 이상 그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알아서 잘 살면 되겠거니 했다. 불만이 쌓여가도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싸우는 것보다 참는 것이 수월했다.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서로를 향한 못마땅함은 아이 앞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렸다. 아이만 잘 크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남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을 쓴 김정은 작가님의 강의를 들었었다. 작가님은 어느 날 너무 힘들다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남편에게 ”우리, 중요한 것 말고 소중한 것을 찾아봐요 “라고 현명한 답을 해줬고 그 소중한 것을 찾으며 가족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에게 진짜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늘도, 어제도, 그전 전 날들에도 당신이라는 큰 선물을 잊고 살아서 미안해.. 잘 지내고 있냐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네지 못해 미안했어. “ 그에게 고백을 하고 나니 그가 보고 싶어 마음이 저려왔다. 매일매일 아빠가 보고 싶다는 아이에게 이제부터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줘야겠다.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