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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Sep 04. 2024

그런 사람

더위와 씨름을 하며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한창 수업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엄마, 아빠 또 울어.” 하며 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와 속삭였다. ‘왜 또 저래..’ 아이가 듣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쉬고는 거실로 나와 보니 남편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의 추모 방송을 유튜브로 보고 있었다. 술 한잔을 마신 후인지라 감정이 더 복받치는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볼만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렇게 눈물샘이 폭발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주일 전에는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의 외국인 선수가 방출된다며 서럽게 울어 우리를 당황하게 했었다.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더니 남편도 그런 시기를 겪고 있는 걸까? 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일이 그에게는 그리 슬픈 일이 라니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다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실연당한 소녀마냥 눈물바람인 그가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권태기의 등장이었다. 


한때 남편을 깊이 사랑했다. 그가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그 애절했던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앗아갔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주기적으로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가 내 삶의 전부였던 시절,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그의 소녀감성이 이번 권태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안쓰럽고 측은했을 그의 눈물바람을 보고도 모른 척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있을 때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눈물이 머쓱했던지, 본인이 왜 슬픈지, 얼마나 안타까운지에 대해 엉거주춤하게 서서 설명하려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심드렁한 내 얼굴이 영 불만이었는지 몇 마디 하지 않고 다시 울기 위해 방을 나섰지만… 


권태기가 오면 그의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린다. 뒤집어 던져진 양말을 구시렁거리며 개고 있는 나를 돕지 않는 무심함이 불만스럽다. 여름이 아직 한창인데도 굳이 다려야 하는 긴팔 셔츠를 꺼내 입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싶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내 맘을 읽지 못하고 나에게 쏟아내는 많은 말들 또한 나를 지치게 한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미운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나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지난 주말, 대학 선배의 생일 파티를 핑계 삼아 남편과 아이를 집에 두고 탈출하듯 집을 나섰다. 지나간 추억을 되새김질하느라 술자리는 길어졌고, 선배의 아내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지지고 볶는 선배 부부의 사는 이야기를 한창을 풀어내더니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왔다. 

“리마아빠는 딸바보야. 애 하고만 놀아.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 그런 아빠를 가진 아이가 부러울 지경이야.” 

“설거지 박사야. 날마다 설거지는 리마아빠 몫이지” 

“책을 진짜 많이 읽어서 박학다식해. 모르는 게 있으면 난 남편한테 물어봐.” 

“얼마나 알뜰한지, 맥주 하나를 사도 마트마다 가격비교를 한다니까.” 

나도 모르게 이어지는 남편 자랑에 선배의 아내가 “좋은 남편이네요” 했다. “그런가요?” 뜨끔한 마음에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러게요. 좋은 남편인데 저는 이유 없이 미워하고 있네요' 하는 속마음은 꿀꺽 삼켰다.


“자동차 워셔액이 떨어져서 한 병 사뒀어. 주말에 좀 부어줘.” 퇴근하고 집으로 도착한 그에게 지나가듯 이야기하니 바로 문밖을 나선다. 나중에 해도 된다는 말에도 “주말까지 불편할 텐데 그걸 왜 미뤄? 잠깐이면 되는데” 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렇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깊게 공감해 주는 사람, 일요일 저녁이면 푸른색으로 물드는 어둠이 쓸쓸해 눈물이 난다는 나에게 “어여와" 라며 자신의 옆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사람, 함께 잘 살기 위해 매일 깊은 고민을 하고 의견을 물어봐 주는 사람. 

그의 작은 배려가 좋아 그날 저녁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보고 싶어졌다. 옆얼굴의 처진 눈이 우리가 함께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권태기는 배부른 투정이었다. 변함없이 따뜻하고 소녀스러운 그는, 여전히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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