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실력 #5
우리유통 사업을 접고 그 다음 사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곧 서른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5년 전, 첫 창업을 했을 때에 비하면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다음 사업을 시작할 정도의 자금과 그간의 사업경험, 이래저래 쌓인 다양한 분야의 인맥이 있었다. 새로운 어드벤처를 시작하기 충분했다.
그즈음 한국은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오랜만에 벤처 창업 붐이 일고 있었다. 이동수단 공유플랫폼 기업인 ‘우버’와 숙박 공유플랫폼인 ‘에어비앤비’ 그리고 OTT(Over The Top)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인 ‘넷플릭스’까지.
(사진 출처: axios)
세계를 혁신으로 주도하는 기업들은 전부 벤처와 스타트업이었다.
당시 정부의 국정 기조 중 하나인 ‘창조경제’는 이러한 흐름에 잘 편승해 국내의 벤처기업 육성에 꽤나 본격적이었다. 바야흐로 한국에도 스타트업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해 가을, 추석이었다.
뉴스에서 프랑스의 어느 벤처기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현지인이 직접 만들어 제공하는 가정식을 방문자들이 신청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플랫폼 회사에 관한 기사였다. 미식의 고장인 프랑스와 제법 잘 어울리는 신선한 ‘식탁 공유’ 아이디어였다.
새로운 시대의 화두는 역시 공유경제다.
공유경제라…… 머릿속에 한국인 현지 주민과 외국인 방문자가 만나서 함께 한국 문화를, 한국의 일상을 체험 할 수 있는 플랫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몇몇 친구들에게 그 사업 아이디어에 대해 의논했다.
문화체험 플랫폼 사업에 가장 관심을 보인 건 이제 막 기업에서 인턴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하고 있던 명훈이었다. 나무늘보 같은 사람 좋은 인상에 웃을 때면 천진난만한 얼굴이 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로는 따라 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고가 유연한 친구였다. 그에게 같이 한 번 사업계획서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가 집으로 찾아왔고 우리는 어떤 서비스를 만들어서 어떻게 제공할지 사업계획서를 함께 작성하기 시작했다.
(애스크컬쳐의 프로토타입인 '컬쳐리스트')
“방문자들이 자기가 체험하고 싶은 걸 현지주민들에게 먼저 요청할 수 있는 서비스를 넣으면 어떨까? 현지주민들이 제안도 하고 방문자들이 요청도 할 수 있게 말이지. 서로 제안과 요청이 가능한 서비스로 만드는 거 어때?” 명훈이가 말했다.
“오… 아이디어 진짜 좋은데?”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현지주민들이 방문자들에게 문화체험을 제안할 수도 있고, 반대로 외국인 방문자들이 현지 주민들에게 먼저 요청 할 수도 있는 ‘양방향 한국 문화공유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 사업의 핵심은 양방향이었다.
“이거 잘만하면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겠는데?” 내가 말했다.
두 사람이 더 합류했다.
민구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2학년 때 포항공과대학교에 조기 입학할 정도로 명석한 친구였다. 그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첫 직장으로 크루즈 배의 선원이 될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친구였다.
다른 한 사람은 석제. 흔히 말하는 ‘엄친아’로 키가 크고, 몸도 좋고(?), 잘생기고, 운동도, 공부도 모두 잘하는 녀석이다. 미국 텍사스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군 입대를 위해 잠시 한국에 귀국해 있었는데 타이밍 좋게 포섭했다.
여기에 ‘고문’의 포지션으로 다섯 사람이 추가됐다.
미국 와튼스쿨에서 MBA를 전공하고 있는 제임스, 싱가포르에서 골드만삭스의 개발자로 있던 주원이, 언론사의 기자였던 예지, 그리고 대기업 직장생활과 사업의 경험이 있던 아버지, 마지막으로 윤식이까지. 이렇게 다섯이었다. 이들은 조언자(어드바이저) 역할로 각자의 본업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사업을 봐주기로 했다.
종로구 세종대로 178, 우리는 광화문 KT 건물 1층에 있던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의 라운지에서 가을 내내 밤을 새워가며 사업 아이템을 구체화시켰다.
동시에 사업의 핵심인 '문화 공유' 체험의 베타서비스/매칭도 시작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보컬로 활동하던 후배(그녀는 훗날 우리 회사에 입사했다)와 한국에 여행을 와 있던 미국인 가수 지망생 M, 이렇게 두 사람이 신촌에서 버스킹을 함께 한 것이다.
한국인 현지주민인 후배와 외국인 방문자인 M, 두 사람 모두 재밌어하고 만족해했다. 성공적이고 기념비적인 첫 매칭이었다.
이후로 한국식 도예 공방 체험하기, 광장시장에서 함께 쇼핑하고 시장 음식 먹기 등을 매칭 시켜주면서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우리는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 한국관광공사 ·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모인 ‘한류기획단’의 융합한류 사업 파트너사로 최종 선발되었다.
각 방송사의 핵심 관계자부터 각 정부 부처의 수장급이 모인 '한류 회의'
융합한류 사업의 공식 파트너.
흔히 생각하는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 사업은 아니었다. 한국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프로젝트라는 취지로 정부가 50%, 우리도 50%로 반씩 부담해 향후 1년간 프로젝트와 사업을 수행하는 계약관계였다.
거기에 나와 공동창업자들이 모은 돈까지 총 10억에 가까운 돈, 적지 않은 초기 사업 자금이 생겼고, 개성이 뚜렷한 파트너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한류기획단 공식 파트너사가 되었기에 정부기관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빠른 일처리도 가능할 터였다.
치열한 입주기업 선발경쟁 끝에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가장 큰 독립사무실을 쓰게 됐다. 광화문 한복판에 꽤 큰, 번듯한 사무실까지 생긴 것이다.
“창고에서 혼자 시작한 스티브 잡스에 비하면 우리가 더 나은 데?” 내가 말했다.
“킥킥” 내 말을 들은 명훈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고, 다소 시니컬한 민구는 “지금 어디랑 비교하는 거야 형. 우리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했어.”라고 말했다.
석제는 웃으면서 “에이, 그래도 우리 잘 되려고 모였잖아. 잘 될 것 같고.”라며 사기를 북돋았다.
나는 이 사업에 그동안 쌓은 글로벌 경험과 내가 가진 능력, 그리고 주변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하기로 했다.
좋은 사업아이디어였고 공유경제라는 글로벌 흐름에도 부합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이 사업을 더 잘되게끔 같이 어루 만져주고 있었다.
우리는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의 인큐베이팅 센터가 이제 갓 리모델링 공사를 끝내자마자 가장 먼저 입주했다. 아직 센터가 정식으로 오픈 전이었고 페인트 냄새도 다 빠지지 않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우리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창문은 반사된 햇빛으로 번쩍거리며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