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팔로80 세 작가님들은 팔순 넘은 나이에 어떻게 그림을 시작했을까
일반적으로 전시회에 가면 작품보다 먼저 우리를 맞아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벽글입니다. 벽글에는 작가 소개나 작품의 배경, 제작 의도, 해설 등이 담겨 있어 관람자들의 작품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지요. 버팔로80 전시를 기획하면서 벽글을 준비하면서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술은 결국 본능일까?
버팔로80 전시의 세 작가님들이 어떤 동기로 팔순 넘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하고 매일의 루틴으로 삼게 되었는지 질문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저는 '예술이란 결국 본능일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세 분의 작품 속에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질문이 벽글에도 조금은 담겨 있기를 바라면서 작성했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전시 벽글을 자세히 읽으셔서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잘 쓸걸.'
시간이 지나고 전시를 올리고 나서야 말인데 이 전시의 Pain point는 주제를 밀어 붙이는 힘이 약했다는 점입니다. 처음 전시 기획을 하면서 잡은 주제는 '80대 예술가들'이었는데 작품을 모아보니 '꽃'이 대부분이었고, 그러면서 또 다시 '왜 80대 작가들은 꽃을 주로 그렸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부제에 '에브리바디 플라워'를 붙이면서 주제가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평소 뭔가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이기도 합니다.
전시 기획뿐만 아니라 기획이나 브랜딩 과정에서 너무 많은 아이디어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문제가 안되지만 버리는게 중요합니다. 주제를 흐릴 수 있는 아이디어나 요소는 지워나가고 모든 액션은 주제를 향해 정제되어야 합니다. (잔가지들을 치는 기술을 좀 더 익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버팔로80 전시의 벽글입니다.
Buffalo 80
에브리바디, 플라워
정선늠 김동협 오화자
2024. 6. 4 - 6. 30
돈의문박물관마을 시민갤러리
70세 이후 각기 다른 자발적 동기로 그림을 새로운 벗삼아 생활하는 80세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버팔로 80이라는 제목에는 들소처럼 강인한 삶의 여정이 느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예술적 힘을 내포하며, 부제인 ‘에브리바디, 플라워’는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꽃처럼 소중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참여작가는 87세에 처음으로 코로나로 인한 무료한 일상을 달래고자 달력 뒷면에 모나미 볼펜으로 우연히 그린 꽃 그림을 시작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는 정선늠 작가와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둔 2018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난해 동목포역사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연 오화자 작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자전거국토종주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 김동협 작가로 모두 80대의 미술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생활 그림 작가들입니다.
전시는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에피소드 1은 김동협 작가의 ‘고인물에서 피는 꽃, 연꽃’으로 평생의 반려자인 할머니의 이름 한자에 들어가는 ‘연’을 모티브로 그린 연꽃 작품들과 자전거를 타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름 모를 들꽃 등 총 33점의 작품이 전시됩니다. 에피소드 2는 오화자 작가의 ‘꽃은 다 이뻐야’로 캘리그래피 작가이자 딸인 이화 작가의 독려와 응원으로 그림을 시작해 매일 매일 그린 꽃 그림 총 20여점이 전시됩니다. 에피소드 3은 밀양에서 밭 농사를 짓는 정선늠 작가의 ‘선늠 할머니의 그림, 밭’으로 지금도 매일 2점씩 그림을 그리는 부지런한 선늠 할머니의 생동감 넘치는 작품 35점이 시민갤러리 2관에 전시됩니다.
EP 1. 고인물에서 피는 꽃, 연꽃
김동협
할아버지가 칠순이 넘어 처음 그린 그림은 연꽃이었습니다. 매일 봐도 보고 싶은 평생의 반려자 이름 한자에 들어간 ‘연’과 무관하지 않겠죠.
동협 할아버지의 그림 선생은 '참 쉽죠잉'의 밥 로스입니다. 일흔이 넘어 밥 로스처럼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사다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국토종주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동협할아버지의 자전거길에는 항상 그림 노트가 함께 합니다. 달리고, 그리고, 달리고, 그리고.. 자전거길에서 마주친 들꽃들이 모두 그림 속에 담겨있습니다.
할아버지의 그림 선생이 밥로스에서 유튜버 이연으로 바뀔 때까지 할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시도하고 그리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캔버스나 수첩뿐만 아니라 커튼이나 에코백이 화폭이 되기도 하고 아크릴이나 수채, 디지털 드로잉까지 다양한 도구들을 쓰는데 거침이 없습니다.
그림 만큼이나 웹툰, 드라마 정주행을 즐기고 인스타그램과 숏츠도 익숙한 요즘 감각 할아버지. 누군가에게는 목소리 크고 혼자 욱하고 잘 삐지는 삐돌이 할아버지지만 이 세상 한사람에게만은 욕조에 장미 꽃잎을 띄우는, 세상 로맨틱한 할아버지입니다.
EP 2. 꽃은 다 이뻐야
오화자
목포에 살며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둔 2018년, 딸의 권유로 우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오화자 할머니. 오화자 할머니는 ‘뭔 놈의 그림을 그리라하냐’며 처음에는 딸을 퉁박 주었지만 어느 새 보이는 모든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현재 6년째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알고 보면 예술가의 뒤에는 반드시 그 재능을 알아보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습니다. 오화자 할머니의 후원자는 딸인 캘리그라피 작가 이화입니다. 오화자 할머니의 이름 한자를 바꾸면 오화가라고 그림은 숙명이라며 응원합니다.
2023년 오화자 할머니는 자신의 그림과 딸인 이화 작가의 캘리그래피를 더한 컬러링북을 펴냈으며 동목포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2025년 목포 통 갤러리에서 모녀가 함께 하는 전시를 계획 중입니다.
다음은 정선늠 할머니 작품 공간의 벽글입니다. 위의 두 개의 벽글과 달리 선늠할머니의 손녀딸인 김청림 선생님이 작성한 글을 그대로 붙였습니다.
EP 3. 정선늠의 그림 꽃,밭.
정선늠
올해 구순을 맞은 선늠할머니,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학생은 할머니뿐인 동네에서
우리 할머니는 평생 햇살과, 식물과, 밭을 가꾸며 지내셨습니다.
도시사람인 우리는
식물이 땅을 딛고 꽃피운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땅이되어 평생 자식과 손주들을 피워내고
이제는 햇살 같은 동심으로 종이 위에서 가꾸는 선늠할머니의 꽃밭.
시골집 툇마루에서,
문득 잡았던 모나미 볼펜과 달력 뒷면으로부터
87세에 시작된 우리 선늠할머니의
인생을 함께하는 반려로서의 그림 여정을 기록합니다.
정선늠의 그림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