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앤대시, 러브앤아나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작가 거나 출판사에서 일하는 설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서점도 좋다.
최근 넷플릭스 로코 드라마 릴리앤대시가 그렇다.
모태솔로인 중국계 미국인 릴리는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빨간 노트를 즐겨 찾는 서점의 책들 사이에 숨겨둔다.
잘나시고 바쁜 아부지덕에 안 봐도 뻔한 유년기를 보내 지적이지만 어딘가 꼬이고 시니컬한 (하지만 잘생긴) 대시는 (역시) 즐겨 찾는 서점의 책들 사이에서 릴리의 빨간 노트를 찾아내고 노트에 적힌 릴리의 말들은 염세적인 대시의 마음에 뭔가 파동을 만든다.
대시는 노트를 통해 릴리와 소통하게 되고 서로 미션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특별한 짝으로 여기게 된다.
사실 현실의 릴리와 대시는 노트를 통해 서로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릴리앤대시는 넷플릭스 하이틴 대표주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와 같은 블링블링 기분 좋아지는 무조건 해피엔딩 드라마다.
귀엽고 발랄한 (키스 한번 안 해본) 매우 긍정적인 동양인 10대 여자아이,
잘생기고 뭔가 사연 있는 듯, 삐딱하고 여차해서 마음을 열지 않은 백인 10대 남자아이,
현실 같아선 웬만해선 만날 것 같지 않은 이들이 노트라는 마법을 통해서 이차저차 우여곡절 엇갈림 끝에 키스하며 끝난다.
뻔해도 너무 뻔하다고?
맞다. 뻔하고 뻔한 이 드라마를 나는 매 에피소드 배실 배실 웃으면서 봤다.
첫회부터 캐럴 합창단의 등장과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드라마는 크리스마스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위해
특별 제작 상품이니 닥치고 즐기세요!
뉴욕의 크리스마스 밤거리와 서점의 분위기
릴리가 잔뜩 치장하고 간 인디 밴드 콘서트가 열리는 클럽,
뭐 쫌 뻔하다고 이 즐겁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 사랑스럽게 뛰어다니는 주인공들을 마다하겠나.
그리고 이 드라마는 마지막 엔딩 에피소드를 제외하곤 너무나 신이 난다.
10대인 릴리와 대시를 응원하며 숨 가쁘게 뉴욕 거리를 따라다니게 된다.
무조건 해피엔딩!
크리스마스니까~
원래 쓰려던 드라마 이야기는 ‘릴리앤대시’가 아니라 ‘러브앤아나키’인데..
릴리앤대시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넷플릭스 드라마 러브앤아나키는
뭔가 한없이 유치할 것만 같은 제목 때문에 손이 안 갔는데
(제목이 러브 & 000 이런 식의 조합은 뭔가 유치할까 봐 겁이 나 못 보겠다. 하지만 이것도 편견이었다.)
첫회를 보자마자 한 번에 달려갔다.
40대 전직 보스턴 컨설팅 그룹 대표였던 주인공 소피, 망해가는 출판사의 디지털화를 위한 컨설턴트로 새로 부임한다.
그녀는 사실 단시일 내에 출판사를 어떤 방식이건 (매각하건, 구조 조정하건, 내부 혁신을 하건)
정확하게 진단해 살리거나 죽이는 이른바 터미네이터 역할을 갖고 있다.
컨설턴트답게 매우 스마트하고 합리적이며 냉정한 그녀는 첫날부터 회사 업무를 부리나케 파악하고
야근을 하는데.. 회사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자기 방에서 습관처럼 자위를 한다.
밤늦게 작업을 위해 회사에 온 20대 비정규직 막스는 자기 방에서 영상을 보며 자위를 하는 소피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 부분은 좀 불편하지만, 사건 전개상 맥락이 없진 않아서 넘길만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피와 막심은 둘만이 아는 은밀한 게임을 하게 된다.
러브앤아나키 뷰 포인트 세 가지
1. 죽네 사네 요즘 출판계 이야기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일하는 출판사 분위기, 책을 만드는 일들,
현재 출판계가 처한 위기감, 유명한 네임드 작가를 출판사가 어떻게 대하는지 등
출판사와 출판 업을 적극적으로 스토리에 엮어간다.
출판사가 판권을 갖고 있는 원작 소설을 (넷플릭스를 연상케 하는) 글로벌 스트리밍 OTT 회사가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출판사와 스트리밍 회사와의 역학관계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2. 습관적 자위에서 스트리킹으로,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주인공
책으로 둘러싼 이러한 환경이 드라마를 흥미롭게 한다면 더 재미있는 건
소피라는 주인공 캐릭터다.
소피는 일을 잘하고 합리적인 전문직 여성이지만,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와 디지털화에 반대하는, 약간의 정신 질환이 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며
습관적인 자위는 그녀 내면의 풀리지 않는 욕구불만, 억압으로 그녀를 묶어 놓은 복잡한 캐릭터다.
그리고 소피 내면의 억압은(그 실체는 정확하지 않지만) 막심과의 흥미로운 도전을 통해서
점차 고삐가 풀리고 스트리킹 같은 행동들을 하며 점차 자유롭게 변해간다.
(여기에 양념처럼 들어간 북유럽 미남 막심)
3. 들어는 봤나, 스웨덴 드라마
이케아 빼곤 스웨덴을 떠올리면 뭐 하나 꺼내놓을 게 없다.
북유럽은... 나와는 너무 멀다.
러브앤아나키는 무려 스웨덴 드라마다.
(과연 스웨덴 드라마를 본 적이 있던가..)
낯선 스톡홀름 도시의 거리와 건물들을 보며,
복지의 아이콘 북유럽도 비정규직 문제가 있구나.
북유럽 조차도 출판계는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는, 새로운 즐거움이 있다.
사실 소피는 아버지처럼 내추럴 본 아나키스트였을 것이다.
하여간 인간은 환경에 맞춰 살아야 하니까, 어쩌다 보니 컨설턴트가 되었고 또 누군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어느새 자연인 본연의 모습을 꾹꾹 눌러 감추거나 다른 색을 입혀 살짝 누르고 살아가게 되니까, 의도되었건 아니건 말이다. 소피처럼 그것을 알게 될 수도 아니면 평생 입힌 색이 계속 덧칠해져 우리 본연의 모습을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모로 애매하고 열린 결말이라 곧 시즌 2가 나올 것 같다.